본문 : 창세기 3,16-21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20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1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제목 : 그렇게 가족이 됩니다
설교일 : 2016년 5월 1일
[좋은만남교회 부활절 제6주일 및 어린이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며 또 그 안에서 성장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복 받은 계절입니다. 만물이 생동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며 왕성한 생명활동을 시작하는 이 계절을 가정의 달로 지정하였습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5월을 가정의 날로 지키는 것은 단순하게 어린이 날이나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등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왕성한 생명의 기운이 우리의 가정과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지만 우리의 가정,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게기로 삼고자 합니다. 우선 가정과 가족이라는 서로 다른 두 단어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가정은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공동체, 가족은 혈연 인연 입양 등으로 연결된 일정 범위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정의를 내리는데 비슷하지요?
들어가서 : 며칠 전 가까운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은 아들이 게임에 미쳐서 엄마의 카드를 훔쳐 게임 아이템을 구입하는데 200만원 가까이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말로 해도 들어 먹지를 않고 꾸짖고 때려도 그때뿐이고 아무 소용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 기숙학교에 보낸다는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 시골 학교를 다니게 해야 할지, 환경을 좀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일의 현상은 분명하지요.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이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가족 간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꿈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어렵고 험한 세상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공부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했나 봅니다. 이렇게 부자 간의 대화는 단절이 되고 아들은 반항심 때문인지 미래에 대한 꿈이 꺾여서인지 게임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이게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의 일부였습니다.
저도 사내 아이 둘을 키우지만 양육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핸드폰이니 컴퓨터니 하는 것들 때문에 대화가 더욱 어렵습니다. 잔소리도 하고 꾸중도 하고 심할 때는 매도 들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비슷한 문제로 속을 썩었을 제 부모님의 얼굴이 오버랩 됩니다. 제 부모님도 크게 말썽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엇나가는 저 때문에 참 많이 속 상하셨겠구나 하는 이해의 마음이 들더라는 거지요. 그렇게 부모가 되는 건가 봅니다.
성서에는 최초의 가정이 나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요즘 말로 하면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아담입니다. 아담은 사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고 아다마라는 ‘흙, 티끌’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아담이라는 사람을 만드신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아담 혼자이고 그저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함께 가족 같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또 다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신체 구조가 조금 다른 사람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하와(그리스어로는 이와, 영어로는 이브)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 사람에게는 이름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담 혼자 있었더라면 그냥 사람이라고 불렸을 텐데 하와가 생겨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되자 이름도 생기고 자기 정체성도 생기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정체성, 자기 자신 됨은 타인,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최초의 가정을 꾸린 아담과 하와 부부가 한 첫 번째 일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은 것도 죄이지만 회개하지 않고 타인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미루는 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면 서로 보듬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희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핑계를 대고 미루고 덮어씌운 겁니다. 그들에게는 형벌이 내려집니다. 여자는 출산이 고통이라는 형벌, 남자에게는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형벌입니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이라는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만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살해하고 그 죗값으로 추방당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부모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힘겹게 산고를 통해 낳은 아들 둘이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인류의 족보를 보면 시조인 아담의 자식이 셋이라고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족보에서도 지워진, 기억도 흔적도 없는 자식이 돼버렸습니다만 이 아들들은 결국 아담과 하와의 가슴에 묻게 되었지요. 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집안은 가정이라기보다 콩가루였고 그렇게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런데 셋이라는 세 번째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5장 4절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자녀들이 더 있었던 것입니다. 부부가 되자마자 죄를 떠넘기는 서로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고 낳은 자식들은 서로 죽이고 죽고 떠돌이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담, 하와, 가인의 마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미워하고 배신하고 헤어지고 떠나간 것이 아니라 이런 와중에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 새로운 자식을 낳고 더 든든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렸다는 것입니다. 가인도 가인 나름대로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돌이가 되었지만 그도 아내를 만나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가인 족의 족장, 시조가 되었습니다. 어쨌건 그들은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서 가족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픔을 간직하고 그 아픔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는 과정, 그렇게 가족이 되는 것인가 봅니다.
서로에 대한 배신과 상처가 있지만 그런 불행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든든한 가족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이 콩가루 집안을 보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복의 열쇠가 무엇일까요? 저는 3장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만들어 입혀주신 가죽옷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의 배신이라는 상처를 가려주는 가죽옷! 무슨 가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죽옷은 어떤 동물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졌겠지요. 우리는 영적인 가죽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은 가죽옷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죄인 되어 허물과 죄의 무게로 허덕이는 삶을 살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고 그 길로 먼저 가시면서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희생을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희생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닌 허접한 존재들인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받은 희생과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기꺼이 희생하고 사랑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으로 가족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해 남편이, 남편을 위해 아내가, 자식을 위해 부모가, 부모를 위해 자식이 희생할 때 비로소 가족이 됩니다. 가족이 되기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강요하고 자기를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앞에 세우는 것이지요.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도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이 사라진 가족 간의 대화를 다시 터지게 하고 굳어진 얼굴을 미소 짓게 만들며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커지게 하고 그만큼 의지하고 마음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이 되어 갈 때 우리의 부모님이신 하나님은 아빠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나가며 : 배우자 때문에,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골치를 썩고 계시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님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서로서로 희생하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가정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아내들은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하라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전합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부부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겠죠? 부부 간, 부모 자식 간, 형제자매 간, 더 넓게는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이 참된 가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 비로소 참된 가족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가족이 되시는 여러분의 가정이 평화와 이해, 관용과 용납, 배려와 희생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