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우리가! | 마가복음 6,34-39 : 방현섭 목사

by 좋은만남 posted Aug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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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6,34-39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5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36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39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제목 : 시작은 우리가!
설교일 : 2016년 5월 29일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 후 제2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비로 만물을 지으시어 아버지가 되시어 진리와 정의로, 어머니가 되시어 생명과 평화로 채우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오늘 모으신 교회에 나와 기쁨과 감사로 예배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세상이 참 시끄럽습니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한국에는 지금 말도 안 돼는 증오범죄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데 대통령은 아프리카 30년 독재자의 나라에 찾아가서 협력을 다지고 있고, 강대국의 모임 G7은 일본에 가서 일본 왕조의 시조를 참배하는 이세신궁에 방문하고, 이것도 사실은 중국과 각을 세우는 미국이 주도하는 것인데 여섯 개의 강대국들이 들러리서서 꼭뚜각시마냥 협력하고 있으니… 한 마디로 제 정신들이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 제가 신앙심 좋다는 어떤 사람한데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저에게 ‘기도 더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지지 않고 ‘요즘도 기도 열심히 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냐?’고 했더니만 비아냥거리듯이 ‘네가 더 운동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제가 잘못 했습니다. 기도란 게 꼭 골방에 처박히거나 예배당에 나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서 하는 것만이 아니고 또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 혹은 운동한 것 같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들어가서 : 말 나온 김에 한번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면 세상이 달라질까요? 여기서 기도는 일반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종교적 방식을 말합니다. 과연 제도화된 종교가 세상을 바꾸고 어수선한 세상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를 만나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만나면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가 열심히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특별기도회를 새벽과 밤으로 열고, 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시국기도회를 한다고 시내 한복판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신앙행위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는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알 수 없고 또 자신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십중팔구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핀잔을 받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시나요? 다 죽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기력을 찾고, 미국이 말하듯 북한 같이 악한 나라들의 지도자를 어느 날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죽게 만들고, 고질적으로 발생할 대형 사고를 기적적인 방식으로 피하게 하고 그럴까요? 그리고 그것이 정말 신자들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고 이 세계를 유지하는 옳은 방법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기적적인 방법은 항상 현재의 부조리를 조금 더 연장시키고 부조리에 익숙해지게 만들 뿐 근본적인 해결책,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나타내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기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혹은 유대인의 왕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 다니다가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기 위해, 아무튼 다양한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들이 광야에 있을 때 날이 저물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지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건 예수님 말씀이건 다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대략 6-7천명은 되었나 봅니다. 그들을 먹이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를 흩어 보내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멍청한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라는 게 대부분 병자,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직업도 없어서 한낮에 예수님 따라 다닐 수 있는 사람들, 즉 뭔가를 사먹을 돈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도시도 아니고 빈 들판 주위에 있는 농가나 마을이 다들 고만고만할 텐데 무슨 수로 5천명도 넘은 사람들의 식량을 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이런 상황을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기적을 보여 달라는 뜻으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중을 아셨는지 예수님이 대답을 하시는데 정말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그러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빨리 기적을 일으키라고 은근히 종용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서 2천만 원 어치 빵을 사다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2천만 원이라는 돈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이제 가서 무슨 수로 그 많은 빵을 사가지고 들쳐 메고 혹은 나귀를 수배해서 거기에 싣고 오라는 것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빨리 기적을 보이라는 은근한 압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알아보라!’ 
결국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이것도 택도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빨리 기적을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마음으로 택도 없는 것을 갖다가 코앞에 들이밀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것이나마 제자들이 가져온 그것으로 기적의 출발점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는 다들 너무 잘 아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어쨌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이 빵이 엄청나게 크게 부풀어 올랐는지 아니면 자가복제를 했는지, 뜯겨져 나간 만큼 자동복원이 됐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사람들이 자기 혼자 먹으려던 것을 감동해서 하나둘 꺼내 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건 성인 남자만 5천명, 합쳐서 6-7천명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마술적인 기적인지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의 시작은 제자들이 몫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에 처해 무조건 기적을 바라거나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제자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또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큰 어려움에 처한 자식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부자이고 능력 있는 아버지만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도와주시겠지’ 하고 있다면 그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요? ‘부모를 신뢰하는 든든한 자식이구나’ 하면서 흐뭇해 할까요, 아니면 ‘그동안 그렇게 키워줬는데 제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 자식을 키웠구나’ 하면서 가슴을 칠까요? 여러분의 자식은 어떤 자식이기를 바라십니까? 자식이니까 돕기는 돕겠지만 매우 속상할 겁니다. 내가 죽으면 저게 혼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밤잠이 안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을 하든 못 하든 그래도 뭔가 해보겠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부모 마음은 그나마 흡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부모 마음이라면 그런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영웅이나 기적이 있을까요? 분명 있겠지요. 그러나 난세를 구할 그런 영웅이나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록 작지만 영웅이 되고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을 만드는 것이 이 시대 기독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하나님의 개입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지금 시작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가며 :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감독은 사실 첫 번째 영화를 왕창 말아먹고 좌절하고 있는 중에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이번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는 아주 잘나가는 배우여서 과연 그를 캐스팅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본을 보냈고 며칠 후 떨리는 마음으로 그 배우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뚜~ 뚜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시나리오를 보냈던 감독입니다. 혹시… 읽어 보셨나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보았습니다. 
“네, 출현하겠습니다!” “네?” “ 난 이미 5년 전에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년전 이 배우가 무명이었을 때 오디션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디션 심사위원들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떨어졌고 결국 ‘에휴 ~ 한두 번도 아닌데 뭐…’ 하면서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서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음성메시지가 녹음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디션 봤던 영화의 조감독입니다. 좋은 연기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맞는 배역이 없어서 같이 작업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언젠가는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낙방한 자신을 챙겨준 이 조감독에 충격을 받은 이 배우는 그때 ‘언젠가 이 사람이 감독이 되면 나는 반드시 이 사람의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배우 송강호는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에 주연배우로 출연했습니다. 
전 이 이야기를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나서 코를 훌쩍거렸습니다. 별것도 아닌 스타들의 후일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꾸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그만큼 살기 어렵다는 반증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시대가 살기 어렵다고 불평만하고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 먼저 작은 관심과 작은 친절로 이웃을 대하고 관계를 만들고 배려하며 바로 그 작은 관심과 친절, 배려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 준엄하게 경고하고 큰 틀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면 안 되겠지만 작은 것이라도 우리 삶에서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첫 단추를 끼우는 역할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작은 노력이나마 실천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기적을 준비하실 줄로 믿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지혜가 넘쳐나게 되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