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냐? | 사도행전 11,25-30 : 방현섭 목사

by 좋은만남 posted Aug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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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25-30
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27 그 무렵에 예언자 몇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내려왔다. 28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일어나,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그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들었다. 29 그래서 제자들은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몫을 정하여, 유대에 사는 신도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30 그들은 그대로 실행해서, 바나바와 사울 편에 그것을 장로들에게 보냈다.

제목 : 나는 누구냐?
설교일 : 2016년 7월 3일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 후 제7주일 및 맥추감사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우리를 만드시고 기르시고 또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강도당한 자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은 후덥지근하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좋은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4일부터 열린다고 합니다. 2016년 1월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150만3천원으로 4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 166만8329원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150만원이건 166만원이건 한국에서 생존하기에 충분한 임금은 아닙니다만 재계는 한 달 생계비로 103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진영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또 한국경제를 돌아가게 하기 위한 내수 진작을 위해서도 시간 당 1만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칼자루 쥔 사람들은 인상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이 쥐어짜 쓰다가 소모되면 버리는 기계로 생각하는 게 분명합니다.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없어서 죽음을 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과 물질, 탐욕을 숭배하는 맘몬과의 대결의 역사입니다. 더 많이 소유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는 인간의 탐욕을 교묘하게 부추기면서 타락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 바로 맘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 당 1만원씩이나 주고 사람을 고용하면 소규모 자영업자는 다 죽으라는 소리냐? 지금도 간신히 입에 풀 칠 하는데 1만원으로 오르면 알바나 직원들만 배부르고 자영업자들은 한 푼도 가져갈 수 없게 된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6,030원 혹은 그 이하로 동결하거나 하향조정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매 순간마다 이런 고민 앞에 서있습니다.

들어가서 : 우리가 무엇을 말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본주의자로 규정한다면 당연히 업주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서민들의 지갑이 두꺼워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어떤 선택을 할 때 과연 어떤 정체성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규정하는 제일 중요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척박한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니시면서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따돌림 당하고 외롭고 팔아먹을 것이 몸 밖에 없는 사람들, 그래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것이라고 격려하고,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가르치면서 살다가, 체제불안정을 염려하는 로마 식민당국의 눈에 들기 위해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자기도 반역자로 몰려 고난을 당할 것이 두려워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숨은 이들은 50일 정도 지나서 놀라운 성령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뛰쳐나와 전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전도라는 게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왕따들이랑 같이 살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삶을 살고 가르쳤는데 전도하는 이들은 예수의 삶을 따라 살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생뚱맞은 이론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숨 걸며 지키려고 했던 신념, 예수님이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를 믿으라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어디로 사라지고 예수 자신이 신이 되고 구세주가 되어, 예수님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남아버렸습니다. 신이신 예수께 기도하고 빌고 가르침을 암송하고 되뇌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리는 예수님이 미쳤다며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따라다니던 가족 중 동생인 야고보가 차지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도 죽어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삶으로가 아니라 이론, 교리로 만들어졌습니다. 삶으로 살았던 예수님은 없어졌고 교리로 만들어진 예수님은 어느새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교리화해버리고 그의 삶을 지워버린 예루살렘교회에 반대한 이들은 북쪽의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교리적 예수님이 아니라 삶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면서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입니다. 그동안은 유대교의 한 분파, 그나마도 후에 유대교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름을 갖지 못했었는데 드디어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주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골칫덩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만찬을 하는 것을 두고 사람고기를 나누어 먹는 식인집단이라고 매도했고, 남녀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여자와 함께 밥을 먹는다고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손가락질 했으며,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오해와 매도, 공격이 있었지만 이들은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면서 살았고 주위의 사람들은 이들의 삶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편견을 이기고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관,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제일 첫 번째 가치로 예수 그리스도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행위, 선택의 기준은 항상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훨씬 더 컸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 직계교회, 원조교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교회의 최고 수장이 예루살렘교회에 있었고 예수님 신앙이 출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삶이 없는 신앙에 저항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안디옥으로 갔던 사람들이 비로소 삶으로 사는 예수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계승하여 바른 길을 찾았으며 그것을 삶의 제일 가치관으로 삼았기에 바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었겠죠? ‘너는 누구냐?’ 안디옥 성도들은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가며 : 이 말씀을 살펴본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또한 두 남녀의 외아들이기도 합니다. 함께나누는세상의 사무국장이기도 하고 감리교회의 목사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역할 중에 저에게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목사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 척 봐도 목사, 딱 봐도 목사, 어느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제대로 된 목사이구나’ 할 정도로 그렇게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목사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체성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몇 %나 됩니까? 우리가 안디옥 성도들처럼 바른 예수상을 가져야 하고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생활인, 직장인, 그 외 다른 역할들에 더욱 열심히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아주 미미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적으로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노동자의 시급을 얼마로 해야 하겠느냐고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갖고 있다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기계처럼 부려먹고, 노동을 숫자로 계산해서 임금을 주는 방식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 그 생명을 생명답게 살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고와 그 이후 처리 과정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번에 청와대 전 홍보수석이 공영방송국 보도국장에게 윽박지른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예배당에서 빌고 기도만 하는 삶의 현장에서 동떨어진 신앙, 가진 사람들을 옹호하는 신앙, 약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신앙은 결코 예수님의 신앙, 안디옥의 신앙, 즉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