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타인의 슬픔을 공유함"
과부의 독자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독자', '과부'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정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이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다'(헬라어-스플랑크니조마이)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과부의 그 고통을 보며 예수님은 참으로 그 과부의 아픔과 슬픔을 동일하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의 공유가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 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의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자비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타자의 아픔과 정직하고 투명하게 대면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 삶의 부정직함과 불투명성은 타자의 아픔과 상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행여나 연민은 지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일한 슬픔을 공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길을 가야하고 타자의 슬픈 탄식의 소리를 듣고 외면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누군가의 슬픔의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외로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공유에서 희망은 꽃 피우게 될 것이다. "타인의 손, 얼굴보다 더 늙은 손은 너의 가슴을 향해 온다. 한 번도 잡아주지 못한 손, 타인의 여윈 손” - 이성복,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