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곳은 어디에
- 철거민과 예수의 고난 -
성경 본문 : 누가복음 22:1~6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묵 상 :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일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동시에 자신의 일을 통해 자신과 사회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나라에 기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일이라고 할지라도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쉼(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어디에서 쉬었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일 했는가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인생의 한 부분이다.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쉬었는가는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난 주간 행적에 대해, 다른 날에 대한 언급은 다 있는 반면 수요일은 아무런 행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쉬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성서의 기자들 역시 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지 어떻게 쉬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이후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행적으로 미뤄 볼 때 예수님께서는 그동안의 자신의 사역에 대한 마음의 정리와 배신할 제자에 대한 용서, 감당하게 될 사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러한 쉼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배신의 아픔과 죽음의 고통을 거부할 수 없는 사명으로 받아들이신다. 이제 평온 속에 마지막을 향해 달려 가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쉼을 취하고 계시던 그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일과 쉼을 깨기 위한 음모가 이뤄지고 있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는 그 음모에 희생되어 일과 쉼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음모를 꾸미던 그들도 몰랐던 사실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대로 십자가 위의 재물로 이 땅을 잠시 떠나셨고, 이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쉼과 안식을 열어주셨다. 십자가 사건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이고 섭리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필수적인 두 요소가 있다. 음모와 예수님의 결단이다. 음모는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쉼의 시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예수님에게 침묵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그 조용한 시간과 장소가 없었다면 어떤 일이 생겨났을까?
내가 중학교 시절 배웠던 ‘사회’ 과목에는 인간 생활의 기존적인 요소로 의·식·주를 얘기했다. 그러나 개발의 망령이 이 땅을 뒤덮었던 지난 수십년 간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은 가장 기초적이라는 주(住)의 문제를 보장 받지 못했고, 자신의 일(業) 혹은 쉼(休)이 있던 그 장소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힘없고 가난한 그들이 자신들의 천국을 마련하여 그 천국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평화를 얻고 힘을 얻어 세상에 나아가야할 준비를 할 때, 보호자인 줄 알았던 정부와 친구인 줄 알았던 이들은 뒤에서 그들의 안식을 빼앗고 그들의 천국을 파괴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제 다가올 사명을 준비하며 침묵 속에 쉼과 따듯한 이들의 사랑 속에 안식과 평화를 원했을 뿐이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안식과 평화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빼앗긴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요소인 주(住)를 위해 싸워야 하는 비참한 행렬에 동참하게 됐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버스로 3~4 정거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는 자신의 일과 쉼의 장소를 지키기 위한 비참한 행렬에 동참했던 안타까운 생명 6명(한명은 경찰입니다)이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그들이 조용히 자신의 일과 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들의 보호자와 친구들은 그들을 거리로 내몰 계획을 준비했고,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과 쉼의 장소를 지키기 위한 싸움 끝에 죽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이 사건은 이미 철거되어 주차장이 되어버린 부지처럼 깨끗이 사라진 듯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가고 있다. 용산에서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고통은 여전하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제 2의, 제 3의 용산은 다양한 곳에서 계속 진행된다. 그렇게 힘들어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들의 쉼의 장소를 빼앗고, 일의 장소가 필요한 이들에게 일의 장소를 지워버리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하여 이어갈 수 있던 인간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고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고난이 이어져 간다면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받아야 했는가.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일까.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을까?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안식을 허락하고 평화를 가져다주고 쉼을 마련해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이제 그 사랑이 모든 이들에게 미치기를 원한다. 더 이상 이 땅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쉼의 장소를 위해 싸워야하는 일도, 일할 장소를 위해 울어야할 일도 없기를 바란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고난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평안 속에 모두가 거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지 않을까….
기 도 :
사랑과 정의로 이땅에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시는 주님. 이 땅에 자신의 쉼과 일의 장소를 국가권력과 자본의 힘에 빼앗겨 슬피 울고 있는 이들의 피울음이 들리십니까. 이들의 아픔을 고통을 주님께서 보듬어 살펴주시고 우리들이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