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모세의 법대로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날이 차서, 그들은 아기를 주님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23 그것은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바 "어머니의 태를 처음 여는 사내아이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한 대로 한 것이요, 24 또 주님의 율법에 이르신 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 한 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율법에 정한 날이 찼을 때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산모의 결례입니다. 남자아이를 해산한 여인은 40일 동안, 여자아이를 해산한 여인은 80일 동안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날이 차면 산모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 정결함을 회복했습니다.(레위 12장 1-8절) 다른 하나는,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처음 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자로 성별되어야 했습니다.(출애굽 13장 1-2절)
성전을 찾은 부모는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본문에는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기를 출생한 여인은 일년 된 어린 양을 번제물로 드렸고,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바쳤는데, 가난할 경우에는 양을 대신하여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비둘기를 바쳤다는 것은 어린 양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제물을 바칠 수밖에 없는 집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 사랑입니다. 넉넉한 사람이 불쌍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하여 주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듯이 가난한 자의 제물을 바치는 집을 택하셨습니다. 부요하지만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 스스로 가난해지신(고린도후 8장 9절) 그분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하여 낮아지신 주님, 주님이 서신 자리에 우리도 서게 하소서. 가난한 자리에 함께 서게 하소서. 우리가 선 자리가 곧 사랑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