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독설

by 좋은만남 posted Sep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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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인들이나 비기독인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열이면 여덞, 아홉은 사랑이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차원적인 대답은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폐해이며, 더불어 교회 교육에 폐해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독설도 사랑에 또 다른 방식입니다. 그 방식으로 사랑하면 불편합니다.

 

만약 예수가 오늘날 이 땅에 오신다면, 예수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이따금식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질문을 받은 이들은 각 자의 머리 속에 있는 상상을 통해서 예수를 묘사하고 자신만의 예수를 구성합니다.  곧 욕망을 투여해서 다양한 예수가 한 교회에 공존하게 됩니다.
  이 책은 책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예수는 오늘날 이땅에 대해서 독설을 끊임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우리네 녹아 있는 사회통념에 대해서 실랄하게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수의 독설입니다.

 

대답은 이렇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은 바로 성육신 신학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왕이 아니고 학식 높은 사람도 아니고 고귀한 성직자도 아닌 천민으로 태어났다. 또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다. ‘신 없음이 가장 두드러진 곳에서 신이 함께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독설. 37쪽]

 

착각은 ‘편견’의 소산이다. 우리는 편견으로, 편협한 눈으로 세상을, 나아가 우주를 읽는다. 우리의 편견 속에 세상이 들어 있고, 우주가 들어 있는 것이다. 대학이라는 구별짓기 장치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진리를 상상해내고, 우주의 법칙을 단정짓는다. (예쁜 혹은 잘생긴) 외모라는 구별짓기 장치, (날씬한 혹은 건장한) 체형이라는 구별짓기 장치, 무슨 가문, 무슨 직업, 무슨 종파... 이러한 편견들 속에서 우주가 들어 있다. 이러한 편견들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구성된다. 이러한 편견들 속에서 우리들 삶의 습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수의 독설. 49쪽]

 

 고통과 죽음 앞에 예의를 잃어버린 종교를, 의전과 교리만 남고 마음이 닫혀버린 종교 앞에서 그는 마치 시위하듯 아버지와 형을 거절했고, 또 한 명의 목사인 나를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독설. 122쪽]

 

오늘날 우리는 명문대 열병을 앓고 있다. 학교교육이 황폐해진 것은 바로 그러한 열병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심지어는 가정에서까지도 명문대 중심의 구별짓기 문화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는 의식한다. 언론매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대학입시에 관한 보도강령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의 얼론보도에서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일반 대중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그러한 체제의 재생산에 스스로 공조하고 있다. 무의식중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자신에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는, 모순적으로 그것에 유보적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독설. 1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