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by 좋은만남 posted Dec 04, 20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8990353599_1.jpg

 

책 표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안식의 참 의미를 말하다” 현대인은 쉼이 없습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면서는 현대인에게 쉼이란 또 다시 무언가를 하면서 쉬는 그러한 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쉼은 무엇일까요?

 

쉼을 갖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쉼은 충분한 쉼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핸드폰에 베터리가 채워지기 위해서 시간이 꼭 필요하듯이, 쉼도 시간에 따라 물리적 쉼의 양이 정해집니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참 쉼인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참 쉼은 성서에 나오는 안식으로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사용하고 그중에 제일 중요하며 의미있는 날을 마지막 날인 일곱 째날로 기념하셨습니다. 바로 이 날이 쉼을 얻는 즉,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열심히 충분히 일하시고 충분히 안식하셨습니다. 이는 시간을 통한 쉼의 중요함을 그리고 안식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을 통해서 시간의 소중함과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축복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013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하느님이 일곱 째날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셨듯이,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도 이 책을 통해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안식일과 평일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수요일 같은 한 날이 다가오면, 그날의 시간들은 공백 상태와 같다. 우리가 그 시간들에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시간들은 아무 특징이 없다. 그러나 일곱째 날의 시간들은 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시간들의 심장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쥐락펴락할 수 없다. 우리가 창출하는 이익이나 우리가 달성하는 진보도 그 시간들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 시간들을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시간은 황무지 같다. 그것에게느 장엄함은 있으나 아름다움이 없다. 그것의 낯설고 스름 끼치는 힘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일 뿐 좀처럼 갈채를 받지 못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일곱째 날에 이른다. 안식일은 영혼을 황홀하게 하는 복을 타고났다. 그것은 치료하는 동정과 함께 우리의 사고 속으로 미끄러져 돌아온다. [아브라함 헤셸, 안식. 68-69쪽]

 

랍비 시므온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공간과 맞바꾸는 자가 영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영으로 채울 줄 아는 자가 영원을 획득한다는 것을,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가 과제로 삼은 것은 공간을 건물과 다리와 도로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해결의 열쇠는 기하학과 토목에 있지 않고 토라 연구와 기도에 있다. [아브라함 헤셸, 안식. 101쪽]

 

탈무드에 따르면, 안식일은 영원 내지 내세와 다소 유사하다. 우리 삶의 일곱째 부분을 낙원같이 경험할 수 있다는 사상은 이교도들에게는 하나의 추문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계시다. 크라스네의 랍비 하임은 안식일이 한 조각의 영원 그 이상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안식일이야말로 영원의 원천이자 천국의 근원이며 내세이서 이루어지는 삶의 뿌리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안식일의 맛을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 영생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내세에서 영원의 맛을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안식일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만큼 슬픈 운명도 없을 것이다. 유대교 전통은 영원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시간 속에서 영원 내지 영생을 맛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아브라함 헤셸, 안식, 146-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