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교황의 이름이 프란체스코이지요. 카톨릭 교단에서 이번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아씨시 지역에서 활동한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성자였으며,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성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다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를 사람들은 상상합니다. 이 때 가장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거시라는 말을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서양학자들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가장 그리스도를 모방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적 삶을 구현하고자 했던 수도자라고 평합니다. 곧 예수처럼 살다간 사람입니다. 또한 단 한마디로 프란치스코를 표현하자면, 탁발수도자였습니다. 그를 따르고자 했던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회를 만들고 수도원생활을 할 때에도 그와 같이 탁발과 가난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즐겨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는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기쁨을 간직하고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로렌스 커닝햄, 김기석 옮김, 224쪽, 11,000원
프란치스코는 자기 비움에 대한 전례법규를 통해 가난한 생활을 겸손과 가난 가운데서 죽는 전범인 십자가와 연결했다. 이것은 프란체스코회 전통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이다. 프란체스코의 삶을 연구하는 이들은 가난에 대한 그의 열정을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틀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단테는 이 점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신곡>의 제 11편에는 프란체스코를 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미니쿠스 성인은 마리아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의 발치 아래서 있었지만 가난 부은 죽음 맞은 예수를 부둥켜안기 위해 십자가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49쪽]
삶의 방식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통상적인 신앙생활 양태와 구별되는 프란체스코회만의 특징이었다. 순행에 대한 강조는 같았다. 일생 수도원에서 살아갈 것을 서원한 수도사들과는 달리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은 자주 ‘길 위에’ 있었다. [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68쪽]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는 바, 그리스도의 인성에 집중하는 것은 프란체스코의 영성에만 있는 고유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전통은 적어도 캔터베리의 성 안셀름의 기도와 명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전통은 예수의 삶과 고난을 매우 강조한다. [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121쪽]
프란체스코와 프란체스코주의가 르네상스의 상상력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게 아니다. 예컨대 프란체스코와 지오토의 무르익은 작품 사이에는 거의 4세대에 가까운 시대적 간격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회화 전통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프란체스코회의 강조와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의 삶이 드러내는 바는 12세기 말부터 13세기에 이르는 문화에 광범위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