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중요한 사건이나 잊지 말아야할 사건, 일들을 뇌에 아니면 마음에 저장해 놓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과 관련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와 전혀 관련되지 않거나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합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때 가담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와 특전사에 의해서 무참히 진압 당하거나 학살 당합니다. 그리고 이 때 사로 잡혔던 시민들은 전쟁포로와 같이 고문당하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하루 하루를 버텨갑니다. 이들은 군법정에서 즉격처분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불과 30년 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내전 중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에서 국가가 시민들을 향해 버린 참극입니다. 그 당시의 시민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정말 납득할 만한 진상조사와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 기억에 굴레에서 저홀로 싸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소년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잊지 말아 달라는... 그리고 제 2의, 제3의 광주사태가 일어나게 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혼의 눈물이 차갑구나. 팔뚝에, 등에 소름이 돋는다! 비가 안 들이치는 출입문 앞 처마로 너는 뛰어 돌아온다. 도청 앞 나무들이 힘차게 빗발을 튕겨내고 있다. 계단 안쪽 끝에 쪼그려앉아 너는 얼마 전 생물 시간을 생각한다. 볕이 나른하던 5시에 식물의 호흡에 대해 배웠던 게 다른 세상의 일 같다.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햇빛을 들이 마셨다 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게 긴 숨을 들이쉬는 나무들의 입과 코로, 저렇게 세찬 비가 퍼붓고 있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 한강, 소년이 온다, 24쪽 ]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 입맛이 도는 것.[ 한강, 소년이 온다, 85쪽 ]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이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에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또.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닌,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120쪽 ]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흐끗한 지물을 뱉으며 썩어 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중략)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히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한강, 소년이 온다, 13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