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20.06.20 14:51

2020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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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평화'의 달]
민족 상잔 비극의 역사로 얼룩진 6월입니다. 70년전에 일어났던 이 비극이 현재에도 한 맺힌 이산가족의 마음으로, 적대적 대결정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로 세뇌되고 정치적으로 억압 받은 민중의 삶으로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오와 대결이 여전한 이 땅에 평화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3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평화의 길을 걷는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고 있어 지역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에 교회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배 참여시 체온 측정과 손소독제 사용, 마스크 착용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교우들과 가정의 행복과 평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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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목사를 내쫓겠다니?
 
참으로 부끄럽지만 감독회장 선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폭력 혐의 목사 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감리교회가 또 성소수자 차별을 조장하는 인권문제로 도마에 올랐습니다. 성소수자 교인의 요청으로 2019년 8월 31일 부평역 북광장에서 열린 인천퀴어문화 축제 중 '성소수자 축복식' 집례자 중 하나로 단에 섰던 이동환 목사님(영광제일교회 담임, 평화교회연구소 간사)이 경기연회 심사위원회에 의해 "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정직·면직·출교할 수 있다는 '교리와 장정' 재판법 3조 8항에 따라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2019년 9월부터 시작된 심사는 충청·중부연회 목회자들의 청원서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심사위원회의의 요구로 경위서를 제출하여 소명하였으나 각서를 요구하였고 자격심사위원회가 신학적 입장을 담은 리포트 작성과 출석을 요구하여 동성애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고 종용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사회적 편견으로 어려움을 격는 성소수자 축복기도가 아니라 전두환 축복기도를 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마땅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축복한 것을 문제시하는 법은 악법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몇 년 전 제천 예사랑교회 변영권 목사님께도 있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설교하고 축복하는 목사를 쫓아내야 한다는 교단과 지도자라니, 과연 감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는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성생활까지 들여다보고 통제하려는 것은 관음증, 변태성욕과 다름없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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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그래도 평화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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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였습니다. 최근 북한은 남북 통신선을 차단하고 남한을 적대시하는 발언을 해왔습니다. 그간 탈북민 출신자들이 대형 풍선을 이용하여 북한 지역에 전단지(삐라)를 살포하는 행위에 대해 항의하고 이에 대한 보복과 남북관계의 파탄을 연일 경고하는 중에 이어진 구체적 행동입니다. 정부예산 170억 원이 투입된 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하여 인근 15층 높이의 개성공단지원센터도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손실보다 어렵게 시도된 남북관계 개선 노력과 한반도의 평화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이 더욱 큰 타격일 것입니다.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정상 간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지만 다시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대북제재와 한미워킹그룹의 간섭 등 한계가 있었지만 한국이 주도적으로 적극적 합의 이행과 관계 개선, 교류를 위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결과라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북한은 더 이상의 자극적 도발을 중지하고 남한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미국 트럼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버려야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모처럼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의 바람이 부나 했는데 그 상징과도 같은 남북 연락사무소가 북한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분노할 만한 일이지만 냉정하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노력을 통해 더 이상의 갈등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단과 대결로 살아온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평화를 허락해 주십시오.
 
 
(36) 종교학, 다름이 만나는 법
 
1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0~1506)는 카스티야(스페인)의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기 위해 서쪽을 향합니다. 인도가 동쪽에 있다면, 지구는 둥글고  서쪽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쉽게 갈 수만 있다면 인도 향신료 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콜럼버스 일행은 인도의 일부에 도착합니다. 그곳의 사람은 인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실제는 아메리카 대륙의 히스파니올라 섬(현재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입니다. 그러니 섬의 사람들은 더더욱 인도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서쪽에 있는 인도 섬 무리, ‘서인도제도’West Indies,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인도 사람’Indian입니다.
 
“저는 아유타국(주 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라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올해 5월의 어느 날, 저의 부왕과 왕후께서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다. 상제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이니 그야말로 신성한 이다. 게다가 새로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사뭇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모를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거라.’
저는 곧 바다 위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아득히 반도를 좇아 이렇게 외람되지만 왕을 모시고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나이다.”
왕은 응대하였다.
- 일연, 「기이 제2, 가락국기」, 『삼국유사』 (소담출판사, 2003), 186-187.
 
2
 
‘릴리전religion(종교)’란 단어의 다른 의미는 ‘다름과의 만남’에서 출발합니다. 다름과의 만남이 비교적 많지 않았을 때 그래서 그 다름을 부를 이유가 적었을 때, 서구는 ‘그리스도교’Christianity와 ‘릴리전’religion을 그리 명백히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의 ‘그리스도교적’, ‘불교적’이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용어 같은 ‘선교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이 히스파니올라 섬(원주민들이 부른 섬의 이름은 아닙니다)에 올라 만난 원주민과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적 삶에 비춰 그들의 삶에 대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생깁니다. 가락국 사람들은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 일행의 불교적 삶에 대해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름과 만나며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와 ‘릴리전’을 구별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처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릴리전이라고 부르고 각각의 릴리전을 부를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릴리전들의 이름은 19세기 이전 정식화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세기부터 유럽에서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이, ‘부디즘’(Buddhism, 1801), ‘힌두이즘’(Hinduism, 1829), ‘타오이즘’(Taoism, 1839), ‘조로아스트리아니즘’(Zoroastrianism, 1854), ‘컨퓨서니즘’(Confucianism, 1862) 등의 이름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의 17세기의 이름들은 ‘일본인의 종교’, ‘중국의 지혜’, ‘힌두인들의 철학’ 등이었습니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종교의 의미와 목적』, 길희성 옮김 (분도, 1997), 94-9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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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의 만남에서 시작한 종교들 연구의 역사는 거칠게 ‘호교론’護敎論적 연구와 ‘종교 현상학’적 연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호교론적 연구는 자기 종교의 우수성을 선언을 목적합니다. 때로 종교들에 대한 객관적 비교 연구의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자기 종교의 장점 또는 이웃 종교의 단점을 드러내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 종교 현상학적 연구입니다. 종교 현상에 대한 ‘판단중지’εποχη의 방법과 종교 현상 자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판단중지란 ‘좋다’ 또는 ‘나쁘다’, 
‘높다’ 또는 ‘낮다’, ‘옳다’ 또는 ‘그르다’라는 판단을 중지, 선입견을 제거해 종교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현상의 배후가 아닌 종교 현상 자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들 연구의 분류는 현재에도 종교 교육의 목적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종교 교육의 목적이 선교일 때 비록 교육에 객관적 모습을 띨지라도 호교론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정하든 보이지 않든 이웃 종교에 대한 폭력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달린 것이라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리고 종교 교육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종교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다양한 종교 가운데 사람들이 있으며, 그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종교 교육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은 바람직한 세계를 함께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 교육의 한 지향입니다.
 
4
 
콜럼버스 일행에 의해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디언이 된 것은 유감입니다. 원주민은 원주민의 이름으로 불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콜럼비아 일행은 그들이 스스로를 부른 그 이름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적에 충실합니다. 아유타국 열여섯 허황옥과 가락국 왕 김수로는 이렇게 혼인을 합니다. 그리고 허황옥 일행에 의해 인도의 불교는 가락국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다름을 만나는 일은 콜럼버스와 허황옥 사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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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착한 남바와 착한 여자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진대 어디에 마땅히 머물러 어떻게 마땅히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착한 남자와 창r한 여자로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하니, 내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滅度하겠다는 마음을 내되 일체 중생을 멸도하였으면 한 중생도 실 멸도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다.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기를, 世尊이시어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진대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이니이까. 佛이 告須菩提하시기를 善男子善女人으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하되 滅度一切衆生已하여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품은 자는 어디에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부려야 하는가? 이와 같은 수보리의 질문에 세존은 대답한다. 우선 일체 중생을 멸도滅度(생사를 없애어 열반에 이르게 함)하리라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서는 한 중생도 멸도한 바 없다고 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자기를 먼저 멸도한 뒤에 남을 멸도하는 것이 바른 순서 아닐까? 그런데 우선 일체 중생을 멸도하리라는 마음을 내라니? 일체 중생을 멸도하는 일이 곧 자기의 멸도를 이루는 일이라는 뜻이렸다.
 
“[대열반경大涅槃經]애 이르기를, 스스로 아직 건너지 못하고서 먼저 남을 건네준다(自未得度先度他)고 했다. 또 참법懺法에 이르기를, 먼저 중생을 건네준 뒤에 부처를 짓는다(先度衆生然後作佛)고 했따.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멸도함이 우리 부처의 마땅히 할 바다. 그러지 아니하면 물物(상대)을 끊어 버리는 것인데 또한 어찌 부처를 짓겠는가?”(陣雄)
 
예수님이 먼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중생이 없는데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중생은 부처가 구원할 대상이면서 부처를 존재하게 하는 바탕이다.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자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의 중생에 자기 자신이 들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중생을 멸도한 뒤에는 한 중생도 멸도한 바 없음을 또한 알아야 한다. 그 마음에 자기가 누구를(자기를 포함하여) 멸도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깨달음이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멸도 이전이나 이후나 건너편 언덕에 있따. 거기밖에는 다른 현장現場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때 다른 곳에 있다가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때 다른 곳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와 같다. 있어 보이지만 실은 없다.
 
광기의 입술에 매달려 살아 왔다.
까닭을 알고 싶어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나는 안에서 두드리고 있었다.(Rumi) 
 
그렇다. 문은 있지만 바깥은 없는 곳이 해탈의 세계요 하느님의 나라다.
 
“마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이밖에 다른 법이 없다. 이것이 곧 참부처님(眞佛)이다. 부처와 중생은 하나의 마음이요 서로 다르지 않으니 아무것과도 섞이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는 허공과 같다. 커다란 해가 천하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아서, 해가 뜨면 밝음이 천하에 가득하되 허공이 더욱 밝아지지는 아니라고, 해가 지면 천하에 어둠이 가득하되 허공이 더욱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명암의 경계가 서로 엇갈려 바뀔 뿐이요 허공의 성性은 확연불변廓然不變이니, 부처와 중생이 이와 같다.”(黃蘗禪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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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을 받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제자에게 구도자가 물었다. 
“가시나무를 알고 있느냐?” 
제자는 스승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가시나무는 어떤 나무들이 있느냐?” 
“탱자나무, 찔레나무, 장미꽃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있습니다.” 
구도자는 제자에게 물었다. 
“그럼 가시달린 나무로 넓이가 한아름 되는 나무를 보았느냐?” 
제자는 스승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못보았습니다.” 
구도자는 제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시가 있는 나무는 한 아름 되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없느니라. 큰 나무라야 다용도로 쓸 수 있지만 가시가 있는 나무로는 궁궐도, 집도 지을 수 없지. 사람도 마찬가지니라. 가시가 없는 사람이 사람을 포용하는 지도자이며 무리 중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느니라. 네 속에 가시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제거해야 할것이다.”
 
가시는 남을 찔러서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합니다. 입을 통해 나온 말의 가시, 손발을 통해서 나온 육신의 가시, 욕심을 통해서 나온 마음의 가시, 나무가 가시가 없어야 다용도로 널리 쓰이듯, 사람도 가시가 없어야 유익한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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