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평화'의 달]
민족 상잔 비극의 역사로 얼룩진 6월입니다. 70년전에 일어났던 이 비극이 현재에도 한 맺힌 이산가족의 마음으로, 적대적 대결정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로 세뇌되고 정치적으로 억압 받은 민중의 삶으로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오와 대결이 여전한 이 땅에 평화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평화의 길을 걷는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수도권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역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에 교회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배 참여시 체온 측정과 손소독제 사용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교우들과 가정의 행복과 평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서신
징계자 명단에서 발견한 낯익은 이름
최근 감리교회 본부가 직원 몇 명을 대기발령했다는 공고가 나왔습니다. 무심코 보니 낯익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행정기획실에서 근무하는 이승현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은 제가 신학대에 다닐 때 동아리실에서 몇 번 보았는데 사람이 진실하고 심지가 굳은걸 보고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반대학에 다니다가 고향 선배를 만나러 감신대에 가끔 왔다가 신학과 목회에 꿈을 갖게 되어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분인데, 아! 우리교회와도 작은 인연이 있네요. 연전에 우리교회가 주문진으로 야외예배를 갔을 때 거기서 만났고 도움을 주었던 목사님입니다. 그 후에 이 목사님이 본부로 오셨는데 이번에 이런 일을 당하신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실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 비리를 저지를만한 사람은 아닌데 징계라니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승현 목사님이 학창시절에 만나러 왔던 그 선배 목사님을 통해 들은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러합니다. 감리교 본부에서 회의를 하면 회의 참석자들에게 소위 '거마비'를 지불을 합니다. 최근에 본부 감사가 잦아 이 거마비 예산을 다 소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감사인 목사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지요. 그러자 감사가 이 목사님에게 반말을 하고 화를 내며 감독회장 직무대행(감리교회 수장인 감독회장은 법적 문제로 현재 공석이고 직무대행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에게 직접 요청을 하여 결국 거마비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거마비 지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감사에게 알리던 중 감사 목사님이 물컵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이 목사님에게 욕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심지가 곧은 이 목사님은 같이 반말을 하면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다툼은 감독회장실 앞에서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결과는 징계로 나타났고 죄목은 결국 괘씸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록 같이 몇 가지가 덧붙여집니다. 감독회장 직무대행은 요즘 누가 뭐라 하든 그 요청들을 다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는 목사가 있다는 소문도 돈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우선 나이와 목회 연수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다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인데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중요한 고위 직무를 맡은 연상의 목사가 젊은 목사에게 욕설을 하고 갑질을 했다는 것이 기가 막힙니다. 또 감독회장 직무대행이 방문인의 민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들어주는 것은 직위를 이용하여 곧 있을 감독회장 선거에서 자신이 직무대행 꼬리표를 떼고 진짜 감독회장이 되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어 기가 막힙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후배와 동료 목사들을 희생제물로 삼는 목사가 배후세력이라는 소문이 진짜라면 그것 역시 소름이 돋습니다.
이게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을 베푼다는 종교, 한국 내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주요 기독교단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무슨 깡패 양아치 집단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독회장 선거의 불법성 문제로 수장이 공석인데다 성폭행 목사로 인해 시끄럽고 부끄러운 감리교회가 이제는 서로 의지하고 독려해야 할 동료 목사들을 상대로 이처럼 갑질과 이간을 일삼는다니, 이게 무슨 종교이고 이게 무슨 주요 교단입니까!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목사가 존경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와 목사는 자기의 이익을 내려놓고 섬길 때 존재의 이유를 갖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젊은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도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으며 죽기까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부끄럽고 위선적인 행태들을 즉각 중단하기를 바랍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늘진 곳에서 성실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에 똥칠을 하지 말아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어린이들을 폭력과 학대로부터 보호해 주십시오.

최근 들어 아동학대 사건 발생에 관한 뉴스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1일 천안에서는 여행용 가방에 일곱 시간동안 갇혔던 아홉 살 아이가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가둔 계모는 자기 아이들에게 감시하라고 시킨 후 음식점과 가페에서 맘카페 모임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창녕에서는 학대를 당한 아홉 살 여자 아이가 4층 높이 건물 테라스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걸고 옆집으로 탈출하여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부모는 물 받은 욕조에 얼굴을 담그고 뜨거운 것으로 손을 지지거나 쇠사슬로 묶어두고 하루 한끼만 주는 등 학대를 하였습니다. 가정 내 아동학대는 전체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에 부모의 징계권이 체벌권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지만 자녀 교육을 국가가 간섭하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출산율이 극도로 낮은 현실에서 이미 출생한 아이들이 폭력으로부터 보호 받고 심신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와 공동체가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공적 육아개념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아이를 낳지 않는 풍조를 걱정하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들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는 현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학대 받으며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하고자 더욱 노력하고 육아를 함께 고민하는 세상이 되기를 빕니다.

전지적 꼰대 관점
안녕하세요. 김형권 목사입니다. 현재 서울 도봉지방에서 이랑교회라는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저의 모토는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고 있고 일명 ‘지붕 없는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내와 세 살 된 딸과 함께 작고 아담하게 교회를 일구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여럿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현재 하고 있는 삶이 다양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빠로, 교회에서는 목사로, 지역사회에서는 주민자치회 부회장 그리고 산돌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 학둥지마을방송국 총괄PD, 실버웨이(데이케어) 운영위원, 교단에서는 지방서기로, 감리회 단체인 새물결에서는 인권위원회, 새물결서울연회 임원, 감리회햇빛발전소 기술팀간사 등등 다양한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열하니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살고 있네요. 자리가 많다는 것은 두 개 중 한가지 일 것입니다. 권력욕이 많거나, NO를 못하는 사람이거나...아마도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몇 년 전 교회를 개척하면서 꿈꿨던 교회가 있습니다. 찾아가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야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최소단위는 개인이기 때문에 개인에게로 찾아가는 것,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고,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라고 지칭하는 집단은 개인이 아닌 단체가 교회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조금 고리타분한 말이긴 합니다만 건물을 짓고 지붕에 모여든 집단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집단주의의 오류를 계속해서 범합니다. 방어적이며,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요즘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찾아가는 교회는 건물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도자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교회는 시대적 요구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랑교회는 그래서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에는 4개의 요양원을 찾아 다녔습니다. 한 때 교회나 사회에서 힘좀 쓰셨던 분들도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교회에서는 활용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돌아가시면 장례예식 한 번 해 주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찾아다닌 어르신들을 모두 합하면 약 70여명정도 되시는 분들과 함께 예배를 했습니다. 또 2개의 가정을 매주는 아니어도 가끔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헌금도, 헌신도, 봉사도 요구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고,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제가 몇 가지의 캐릭터로 살아가는 이유는 지붕 없는 교회를 이루고자 함입니다.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나 교회 리더들은 쉽게 말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사십시오,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으십시오.” 등등 세상 속에 구별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이 집단이기주의를 만들어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붕 없는 교회요, 찾아가는 교회입니다.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동기화되고,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울고 웃는 것,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어느 교회에 첫 도장을 찍으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마 지금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가실 것입니다. 찾아가는 교회에서 저의 역할은 예수님께 그들을 소개하고, 또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런 중개자의 역할로서 찾아가는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내 직업이 무엇인지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가끔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저를 목사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씨, ~~샘,~~님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도 하고, 웃고 떠들고, 가끔 화도 냅니다. 이렇게 저는 세상 속에 교회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방현섭 목사님과 어느 모임에서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어 만난 자리에서 저를 잠시 조용한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크신 분이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잔뜩 겁을 먹고 따라나셨습니다. 정말 조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첫 마디가 “형권아, 너 우리교회 주보 본다고 했지! 솔직하게 말해! 너 주보 자세히 보냐~!!” 뜨끔하면서도 조금 당황했습니다.
“주보는 봅니다. 근데 솔직하게 가끔 자세히 보긴 하는데 대체적으로 그냥 주보가 올라왔구나 하며 스치듯 읽습니다.” 라고 말을 해놓고는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방 목사님은 “우리 주보에 글을 정기적으로 올려보는 것이 어때~ 형식은 뭐~ 자유롭게 쓰면 될 것 같아. 할 수 있겠어?”라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첫 번째 든 마음은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이 뭘 쓸 수 있을까?” 두 번째 든 마음은 “내가 쓸 위치가 될까? 내가 뭐라고~” 세 번째 든 마음은 “뭘 써야하지?”였습니다. 대략 난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뭔가 기분 좋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난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보가 여느 동내교회 주보 같지 않은 느낌이 물신 풍기는 그런 매체에 글을 계속해서 올린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방 목사님이 “아무나 글 올리는 거 아니다~”라고 던진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귀가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특별히 생각해 주셔서 내가 아무나가 아니란 이야기~ 뭔가 가슴을 뜨겁게 했지만...감사했습니다.
일주일간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글을 쓸까? 어떤 형식으로 쓸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한 가지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나의 삶을 정리하고 싶어 졌습니다. 인생 중간 즈음 하여 그간 살아온 인생을 잠깐 점검하고, 회상하면서 다시금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며 짧지만 인상 깊었던 나의 삶을 통해 간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편하게 나누는 글이 되길 소망합니다. 혹 이 글이 Latte is a horse(라떼는 말이야), kkondea story(꼰데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혹 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평범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Latte), 누군가에게는 새롭겠지만 흥미롭지 않은 (kkondea) 이야기가 될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랑교회 김형권 목사님은 다채롭지만 그만큼 고단한 삶을 살아온, 균형 잡힌 신앙과 사회참여 의식을 겸비한 감리교회의 젊은(40세를 젊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목회자입니다. 김 목사님의 기운 넘치는 삶의 여정과 목회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교회와 다른 작은 교회, 젊은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경험이 될 듯하여 새롭게 연재를 부탁하였습니다. 관심과 열독을 부탁드립니다.
수보리여. 만약에 착한 남자 착한 여자가 나중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서 얻는 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듣고 마음이 매우 어지러워져서 의심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須菩提여.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여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여 狐疑不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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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이 경험하는 세계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는 그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 몸을 가지고서 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의 뜻은 헤아려 알 수 없고 그 열매 또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다.
須菩提여. 當知어다. 是經義는 不可思議요 果報亦不可思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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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을 머리로 헤아려 알고자 하니 머리만 아플 뿐,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도무지 얻는 바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내 몸을 돌고 있는 피에 대하여, 그 발생 과정과 성분과 소멸 과정에 대하여 아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피가 소중하다는 사실, 그것이 없다면 몸도 없다는 사실은 내 머리도 알고 몸도 안다.
이렇게 사람은 불성佛性에 대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하여금 몸을 훼방 놓지 못하도록 잡도리를 게을리하지 말 일이다.

어느 교회 365일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가는 집사님이 계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때로 목사님이 나오지 않는 새벽도 이 집사님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다. 아무리 늦게 잠이 들어도 새벽 4시 30분이면 눈이 뜨였다.
어느날 전날 피곤하여 깊이 잠이들었는데 누군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너 어서 빨리 가서 새벽제단을 쌓아야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자신을 깨우는 정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사단이었던 것이다.
그 날 새벽기도회를 나가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자기 의를 쌓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만큼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못하냐”는 정죄의식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겸손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너희는 왜 이런 것도 못하냐는 교만의식이 영혼에 쌓여있었던 것이다.
집사님은 그날 새벽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했다.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인데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 그것이 공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한 평생한 장사가 마치 무슨 특별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연마 과정으로 소개되고 또 스스로도 장인이라도 된 듯이 뻐기기도 합니다. 본말이 전도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될 때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거리에서 같은 휴지를 주워도 어떤 사람은 돈을 위해 줍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봉사를 위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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