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년지기[좋은만남교회 주현절후 제5주일 낮예배 설교]
성경 ; 요한복음 15,12-15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며 :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과 깊으신 자비가 도우심을 바라며 그 손길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절이 수상합니다. 용산사태로 국민들의 마음이 상처를 입었는데 또 검찰의 수사과정을 지켜보니 또 한번 국민들이 상처를 입겠습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만행이 밝혀지고 싸이코패스라는 단어가 부쩍 자주 입에 오르내립니다. 어느 하나 기운 나게 하는 소식이 없는 중에 김연아 선수의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우승소식이 해갈을 풀어주는 한 줄기 소나기와 같았습니다. 넘어졌다 일어났는데도 기죽지 않고 곧바로 다시 연기를 펼치는 김 선수를 보면서 우리 국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때에도 정신 바짝 차리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잇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더욱 단단하게 스스로를 연단하는 성도님들, 국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저도 이제 꽤 나이를 먹었나봅니다. 자구 세월을 생각하게 되고 시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제 설교에 세월, 시간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도 역시 세월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십년이라는 시간단위는 강의 물줄기가 바뀌고 산세가 변하는 꽤 긴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강산이 변하는 동안 교분을 나누어온 가까운 벗을 십년지기라고 합니다. 요즘 10년을 사귄 친구라고 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년지기는 꼭 10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가깝게 교제하며 교분을 나눈 관계로 서로의 심경을 다 알고 피붙이 같이 지내는 친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한민족의 경우에는 친구관계가 유달리 더 의미심장합니다. 불알친구, 죽마고우 등의 말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친구관계를 상정합니다. 오성과 한음이 가장 대표적인 막역한 친구관계로 어린시절의 일화들이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들려집니다. 성경의 다윗과 요나단도 십년지기라고 할 수 잇을 것이고 사도 바울도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던 디모데, 아볼로, 바나바 등과의 관계가 그런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관계를 떠올리며 십년지기라는 단어를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올해 햇수로 10년째 됩니다. 그러니 최소한 여러분들과 제가 십년지기인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의 피붙이와 같은 그런 관계로 지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니 시간만 10년이 지났지 관계는 그만큼 깊어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허물 없이 내보이면서 깊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심방이나 종교적 행사 외에 교우 가정을 방문하여 밤을 새며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나눈 적이 있었던가, 개인적인 관심을 진지하게 표현해본 적이 있던가, 생활을 돌아보면서 개인적으로 신앙상담이나 면담을 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예 보다는 아니오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사람이 같이 하룻밤을 지새보면 그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님 집에서 하루 잠을 자본 적도 없고 또 성도님이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자본 적도 없습니다. 성도님과 밖에 나가 외식을 해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집에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대접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와 여러분의 관계가 그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이라는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을 조금 바꿔 먹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 만큼이나 관계도 길고 깊어져야 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에게 그처럼 마음을 열고 용납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관계가 그렇게 해야지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여러분의 관계가 십년지기가 되면 저절로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도 십년지기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의 여러분은 예수를 믿은 지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아마도 대부분 십년지기를 훨씬 넘는 3-40년지기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과 알고 지낸 시간만큼 깊고 절친한 관계가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바로 확인하고 세워야 할 관계는 친구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친구의 관계로 만나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명백하게 증언해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여전히 남아있을 뿐 예수님을 친구로 모신 분은 얼마 없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십년 동안 우리에게 친구가 되자고, 막역한 친구가 되자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더욱 친근하게 모셔 들여 십년지기의 관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십년지기의 모범은 예수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뭔들 모범이 아니겠습니까만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주 탁월한 모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신 것이 목사와 교인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세주와 구원 받은 사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관계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목사나 스승, 구세주나 창조주였다면 우리의 의사를 고려하거나 우리의 의견을 듣거나 하지 않고 주로 명령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하시기보다는 들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할 때 예수님은 아무 말도 없이 땅바닥에 뭔가를 쓰시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그 여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친분으로 깊이 교제하셨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가족과는 눈빛만 봐도 기쁨과 슬픔을 잃어낼 수 있을 만큼 깊은 관계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는 얼마나 들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들어주기보다는 말하기를 즐겨하였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먼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죄보다는 그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을 용납하셨습니다. 말하기보다는 그들로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십년지기, 친구의 관계를 더욱 깊이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부족한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더 즐겨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비평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를 더 즐겨하면서 그것을 마치 사랑이니 관심이니 하는 것처럼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십년지기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말을 듣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맺으셨던 십년지기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나가며 :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친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더 이상 종이나 부하나 피조물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이미 우리와 수십년을 관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구관계를 제대로 갖지 못하였고 그러다보니 목사와 교인들과도 십년지기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십년지기 관계를 회복하고 성도들 간의 십년지기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참된 십년지기의 관계를 누리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