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사도행전 16:27-32
27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28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29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들어가며 : 어둠 속에 내버려진 아이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럼에도 비록 어둡지만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위로와 도우심을 간구하며 그 앞에 나아온 성도들과 그 기도 위에 충만하게 임하실 줄로 믿으며 축원합니다.
지난 날 우리 역사에 춘궁기라는 시기가 있었지요. 보릿고개라고도 하는 그 어려운 시절,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던 시절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티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린 생명의 눈빛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녀들의 눈망울이 삶을 이겨낼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이명진 성도님, 정미현 집사님 가정에 귀한 생명의 선물을 주신 것은 또한 삶을 이겨낼 힘을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멀티플 선물을 받은 정미현 집사님 가정에 복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들어가서 ;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려웠던 때를 들라면 아마도 일제 강점기 36년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시기라 막연하게 상상만 할 뿐입니다만 전에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같은 책을 읽어보았더니 정말 말로 할 수없이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면 일본놈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놈 못지 않게 일본놈보다 더하게 수탈하고 착취한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같은 동포이지만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일본인에게 잘 보이고 권세를 누리고자 양심도 팔고 동포를 팔아 먹는 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들은 농촌에서는 마름으로 나오는데 소작농들을 들볶는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후에 대대적인 친일부일자 색출과정에서 보인 과격성만 보더라도 친일자들이 얼마나 민중들을 괴롭혔는가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다 역시 우리와 상황이 비슷합니다. 유다도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말할 서도 없지만 로마에 기생하여 동포를 등쳐먹는 이들이 있었으니 세리가 그 중 한 부류였고 다른 한 부류는 병정들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로마병정들은 사실 웅장하고 위용이 넘치는 로마군인이라기보다는 변두리에 진을 치고 있는, 로마 정규군에 비해 월급을 절반밖에 받지 못하는 초라한 외인부대, 혹은 현지인 병사들입니다. 군단 단위로 몇 천 몇 만이나 되는 대규모 로마군은 유다의 반란 때에만 볼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먹고 살기 위해, 아니면 난세에서 한 몫 잡아보려고 로마군대에 입대하였을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또 그런 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로마에 끈을 대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유대인들을 종종 부역 등으로 부려먹기도 하는 로마병사의 직위가 부러움의 대상이고 공포의 대상일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탐욕과 공포의 대상이며 목적인 셈입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탐욕과 힘과 권세로 동포를 억누르고자 하는 인간군상의 대표적인 모양인 셈입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잡혀오자 한껏 호기를 부리며 그들을 막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깜빡 잠이 든 새에 일어난 일을 보고는 놀라서 당연히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폭력적인 선택을 합니다.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병사의 인생은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삶의 집합체였던 것입니다.
로마 병정을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상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돌파구를 찾는답시고 더욱 파괴적인 탐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환경생태계야 어찌되고 영세 세입자들이야 어찌 되건 그저 막개발과 난개발 토목공사로 더 큰 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에 반대하는 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폭력과 공포를 선택하여 덤벼봤자 축가는 것은 너희들 자신이라는 듯이 공격과 폭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탐욕과 공포의 시대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로마 병사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로마 병사는 자살을 급히 제지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탐욕과 공포의 시스템에 익숙한 이 병사에게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울과 실라가 도망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급히 뛰어들어가 여전히 감방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탐욕과 공포에 익숙한 자신의 삶이 어떻게 해야 놓여날 수 있고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느냐는 극히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탐욕과 공포의 세계에서 해방되고 놓여날 수 있는 희망인 것입니다. 이 말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탐욕과 공포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계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셨던 것이지요. 탐욕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 나눔의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십니다. 폭력적 공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삶으로 인류사회의 희망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의 삶을 보면 탐욕과 공포가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폭력적인 재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은 결국 구원 받지 못하고 여전한 탐욕과 공포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사도들에게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것, 더 큰 것, 더 넓은 것을 소유하고자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한정된 자원을 소유하고자 무분별한 경쟁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러시안 룰렛처럼 네가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폭력적인 발상으로 탐욕의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파괴로 인한 심각한 자연재해를 겪고 있는 마당에도 탐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대운하니 4대강 유역정비니 하면서 더 많이 더 깊게 더 넓게 생태계를 파괴하자고 합니다. 철거민의 연대는 더욱 커지는데도 여전히 폭력적 재개발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광우병 위험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쇠고기를 수입할 것을 밀어붙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만 이 시대의 파괴적인 종말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진리와 정의 사랑과 생명, 평화의 복음을 따라 나누고 섬기고 포기할 때에 우리는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신비는 무슨 특별한 경험이나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는 세속의 기준으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것을 선택했을 때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탐욕과 공포를 유일한 가치로 인정합니다만 예수님은 그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삽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 자체는 이미 신비이고 이미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암울하고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을수록 더욱 예수에게서 더 분명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가며 : 탐욕과 공포에 익숙하게 살아가던 한 로마 병사의 삶이 예수를 만남으로 해서 전혀 새롭게 변했습니다. 탐욕과 공포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인생이었지만 예수를 만났을 대에 그는 더 이상 탐욕과 공포의 노예가 아니라 인생의 주체자가 되었고 구원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돈과 힘과 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이 시대는 여전히 속삭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 길을 넓은 길이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에 모신 이는 이제 탐욕과 공포의 세계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여러분은 이제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인정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