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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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843~48

43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주지 못하였다. 44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45 예수께서 물으셨다.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7)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46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47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 알렸다. 48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제목 : 결국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설교일 : 201483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절후 제8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8월을 맞았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이 7년이나 된 것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반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여기저기 사고들이 터졌지만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기득권세력은 그 권력을 유지하였고 또 국민들이 그들을 선택해주었습니다. 답답합니다. 게다가 덥기까지 하고 또 태풍까지 오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이런 고난의 시절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루기 위해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있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웨슬레 목사님이 평소 친분이 있던 어떤 사람과 이야기 하면서 요즘은 믿음 생활을 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가 좋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고, 교회 다니기 점점 싫어지는데 어디 정말로 좋은 교회가 있으면 추천 좀 해 주세요. 그런데 가면 믿음 생활을 더욱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웨슬레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당신은 그 교회에 절대로 나가지 마세요.” “왜요?” “그 교회라도 좋은 교회로 남아 있기를 바라니까요.”

우리 교우님들은 어디에 가시더라도 좋은 만남을 갖는 좋은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구원은 가변적인 것이다.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합니다. 구원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도 구원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성서에서 구원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주로 전쟁이나 외적의 침입 등 죽음에 이를 만한 위기와 위험에서 건져내 주는 것, 즉 생명을 살려주는 것, 큰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즉 구원이라는 단어는 죽음과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것이 원초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점차고 바뀌게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예수님 당시에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구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에는 구원이 단순하게 죽음이나 위기, 전쟁이라는 실질적인 위협에서의 건져냄이 아니라 종교적 개념과 교리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21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하면서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구원은 생명에 대한 실질적인 위험이 아니라 교리적인 죄라는 개념에서 구함을 받는 의미가 돼버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갖고 오늘의 사건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2. 혈루병 여인의 믿음과 구원

예수님이 회당장의 딸을 고쳐주러 가기 위해서 길을 가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예수님의 옷술을 만집니다. 그때 어떤 치유의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느끼신 예수님은 누가 자기를 만졌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 앞에 선 것은 혈루병, 정확하게는 산부인과적 하혈병으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께 자기가 왜 웃술을 만졌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를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불과 5분 남짓 순간에 일어난 일일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나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이 그 여자 자신을 구원하였다는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뭐가 이 여인을 구원하였다고요? ‘네 믿음이’, 네 믿음이 어떻게 하였다고요? ‘구원하였다고요!

3. 구원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합니다.

여인은 왜 그렇게 구원받기를 갈망했을까요? 원죄나 자범죄 뭐 그런 교리적인 개념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계속 피를 흘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른지요. 철저하게 육신적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그 육신적 고통이 종교적 규율에 의해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 인간들에게 치이면서도, 그 재산을 전부다 써버릴 정도로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고침 받지 못한 현실적인 이유로 구원을 갈망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병을 고침 받기 원해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은 그 여인이 구원 받았음을 선포하십니다.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 고통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던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은 어떤 의미로 구원을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는 이생에서의 삶이 아무리 개떡 같더라도 예수 믿음으로 다음세상에서는 낙원, 즉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에게 너희가 생각하는 구원 받은 상태, 즉 천국은 어떤 모습이냐고 물어보니 최신식 사양의 컴퓨터가 초대형 모니터에 연결돼있고 옆에는 과자와 컵라면, 음료수가 산더미같이 싸여있고 제재하는 어른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껏 컴퓨터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답니다. 지겹게 공부공부 하면서 경쟁사회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에게 탈출구는 컴퓨터 게임입니다. 교리가 아니라 현실의 반영입니다. 참 청소년다운 유치한 대답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청소년들보다 좀 덜 유치할 뿐이지, 지금 살고 있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대안적 모습을 담은 것이 구원, 그것이 실현된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은 비슷비슷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돈 걱정 안하면서 펑펑 써볼 수 있는 것이 구원일 것이고 그런 곳이 천국이라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건강이 약한 사람은 건강을 얻는 것, 외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가정과 친구를 갖는 것이겠지요.

세월호 사고로 허무하게 수백 명이 죽어가는 현실에서 이 시대의 구원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죽어간 단원고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구원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너희를 구원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죽어서 가게 될 세상은 안전하게 안식을 누리면서 죽음 없이 평생 살게 될꺼라는 약속을 해주는 것이 과연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세상 너머 저 어딘가로부터 지금 이 자리, 우리가 서있는 이곳으로 옮겨 놓아야 할 때입니다.

4. 구원은 바른 가치관을 갖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기만 해도 혈루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고 실제로 그렇게 했는데, 44절의 말대로 과연 정말 나았을까? 두려움에 떠는 여자가 그 상황에서 나았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낫지 않았다, 예수의 기적은 다 거짓말이다 하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혈루병 치료 증거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속옷을 내려서 피가 멎은 것을 보여줄 수도 없는 상황인데, 정말 낫긴 나았을까?

예수님은 네 병이 나았다고 하시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교리적으로 해석하면 병마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뜻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병 자체를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병이 실제로 나았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병 때문에 재산까지 다 까먹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 병에 매여 살고 있는 현실을 바꾸는 것도 포함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 가치관 목표가 제대로 바르게 잡혀 있느냐는 것입니다.

5. 이 시대의 헛된 믿음과 삶의 목표

구원은 어떻게 이루느냐 하면 예수님이 혈루병 환자인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에 열쇠가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습니다. 네 믿음, 네가 했다는 것입니다. 신이 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도 아니고 그 자신이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구원을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내가 구원의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는 지금 어떤 구원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지속적이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으며 가치도 없는 것, 그저 육체적이고 얄팍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구원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얻으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물질만능주의, 풍요지상주의, 돈에 눈이 뒤집혀서 혔고, 이익만 된다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안하고 일단 찍어 먹고 보는 이 세대, 돈 때문에 서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싸우고 원수 혹은 동지가 되는 것이 이 세대가 추구하는 구원입니다.

이번 7.30 재보선을 보면서 기가 막혔습니다. 야당의 무능도 있지만, 세월호 희생자들이 여전히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데, 세월호 희생자를 교통사고 희생자라고 하고 노숙자 취급을 하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 반인륜적인 사람들, 권력에 눈이 뒤집혀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간의 도리조차 짓밟는 이들임에도, 그런 이들이 구원을 얻게 해 줄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여지 없이 드러낸 선거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헛된 구원론에 길들여져 썩어빠질 것을 사랑하면서 그것의 해독에 중독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혈루병에 매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6. 우리에게 구원을 줄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따라 살자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겠지요? 우선 그동안 구원이라고 믿었던 허무한 삶의 목적을 포기하고 제대로 된 바른 가치관과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시대적 요구와 이웃의 요청에 따른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선천적으로 얻은 양심에 따라 제 정신을 차리는 것만이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바른 믿음 갖기를 기도하면서 또한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념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없는 것에 아쉬워하다가 이미 가진 것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의미와 재미를 찾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할 때 우리 삶과 우리 존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한국사회 개혁을 10대 과제를 선정하여 선언하기로 하여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느끼는 것이 대부분의 것이 다 국가의 정책에 달려있더라는 것입니다. 통일, 여성, 빈곤, 경제정의 등등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라는 것들이 결국 국가와 정치의 시스템에 민감하게 연동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꿔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죽은 다음에 맛보게 될 세상을 바라는 구원만 바라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나가며 :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헛된 구원의 사탕발림에 속지 말고 지금 이 땅에서 나와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건강하고 바른 구원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혈루병 여인처럼 담대하게 그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이 복된 여정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께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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