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102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2010년 3월 28일(종려주일) 좋은만남교회 낮예배 설교


'건망증'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21장 6~11절/ 마가복음 15장 11~15절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7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8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11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21장 6~11절]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3 그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 찬양 소리를 외칠 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준비된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오늘을 지나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되지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시다가 성전체제를 수호하는 자들에 의해 로마법정에 서게 되고, 십자가를 지게 되기까지의 일을 기억하며 또 그의 고난에 동감하고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아무쪼록 사순절 마지막 주, 우리의 길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의 행적을 다신 한 번 확인하고, 살펴보고 그 길 조심스레 따라가 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에 저는 한 의미 있는 영화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서 영화 관람을 하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작은 연못>! 들어 보신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평범한 농촌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몰살을 당하는 과정이 영화의 전부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영화의 비참한 이야기가 실상 우리의 실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른 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1950년 6월 한반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지요. 전세가 불리해진 남측의 국군과 미군은 부산을 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합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 1 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의 경부선 철교에 피난을 가고 있던 한국인 피난민들을 철교 위에 모아 놓고 학살한 사건입니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영화에서는 꽤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는데, 단지 미군이 자신들을 도와 줄 거라 생각하며 피난길 중에 미군을 만난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기뻐했던 피난민들의 얼굴표정, 그들이 내쉰 안도의 한숨이 채 멎기도 전에 총으로 폭탄으로 칼로 어린아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무참히 살해되던 장면, 쓰러진 채 억울한 눈망울에서 흘러내리던 그 피눈물들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억울하게 죽어간 민간인만 해도 공식적으로 3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실로 안타깝고 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라 포장되어있던 미국의 실체는 한국전재에서 우리나라를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주었다던 미군의 실체가 드러나는 사건이지요.

노근리는 굴곡 많은 우리 역사의 아픔의 기억입니다만, 사실 이 사건은 1999년이 되어서야 전 세계에 그 실상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약 50년간 우리 역사는 노근리에서 죽어간 이들을 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아니 그래야 헸습니다. 실상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때 일어난 수많은 양민학살 중 빙산의 일각일 뿐, 묻혀져 있는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지난 100년을 돌아볼 때 항상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 우리는 우리의 아픔들을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그 아픔의 진실을 들추려했다면, 미국을 상대로 그들의 만행을 폭로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서 IF 만약을 가정한다는 것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만, 만약 그러했다면 우리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고, 북한처럼 미국이 이야기하는 악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여간 수많은 진실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망각하고 여기까지 살아왔지요.

오늘 우리는 함께 두 개의 성서 본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먼저 앞의 장면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의 여러 곳을 떠돌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고, 때론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꿔 놓는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님, 3년여 간의 그의 공생애는 그야말로 하나의 축제이자, 생명의 행진이자, 당시의 모순된 구조에 대한 예언자의 소리,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그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와 그의 일행을 향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찬양하며, 그 여정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에게는 그 상황이 이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하실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많은 사람들의 환대와 호응이 당연했다고나 할까요. 제자들에게는 그 자리가 그동안의 자신들의 수고로움의 보상으로 주어진 아주 맛좋은 열매와 같은 상황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드디어 대업을 이루는구나!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지만 예수님 본인에게 이러한 일은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에, 온 세상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러 가는 그 길의 끄트머리에 이러한 환대와 찬양이라니. 또한 그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리도 찬양한단 말인가? 라고 예수님께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들은 하나 둘 자신의 옷을 벗어 예수님 가시는 길 위에 깔아 놓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동으로 왕과 같은 이에게만 취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종려 나뭇 가지를 흔듭니다. 또한 호산나 당신을 찬양한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며 이 땅을 구원할 사람, 또한 구약의 예언을 완성할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지금 추앙받고 있습니다. 예수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성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가 누구냐? 사람들은 수군되고, 결국 갈릴리 출신의 예언자라는 칭호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붙여지기 시작합니다.

함께 읽은 두 번째 성서는 앞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 때 이스라엘 지방을 감독하고 행정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의 사이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가 볼 때는 분명히 아무 죄도 찾을 수가 없었건만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은 다짜고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못박으시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 성전체제의 핵심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허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죄인'이라는 '사형수'라는 칭호가 붙는 순간입니다.

앞의 두 본문은 결국 예수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산나!"라 외치던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5일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세상을 다 바꿔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당당하게 예수님의 곁에서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던 제자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가는 데에도 5일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5일이라..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5일 전까지 자기들의 목숨까지 꺼내놓을 것 같던 군중들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까맣게 잊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결국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알 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인이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자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저는 건망증이 좀 심한 편입니다.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 것을 시작으로,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들을 제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잘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단기기억상실증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저의 환경 속에서 이렇게 잘 잊어먹고, 특히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저녁 교회 청년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교회 김나영 청년도 건망증이 심한 것 같습니다. 혹시 건망증 없느냐는 저의 물음에 나영이는 흔히 TV에서만 봐오던 이야기이지요. 전화기를 냉장고에 실수로 넣고선 다른 곳에서 한참을 찾다가 나중에야 겨우 겨우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하여간 우리 주변에 이러한 건망증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복잡하게 사람과 사람이, 또 일과 일이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건망증의 특징을 좀 살펴보자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건망증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정기적인 것입니다. 한 번 어떤 사실을 망각한다고 그것은 건망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습관화 되고, 정기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서 건망증이라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건망증의 두 번째는 그 죄과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용인된다는 점입니다. 건망증은 주로 유머의 소재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정도의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그 정도야. 이것이 건망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이지요. 괜찮아 괜찮아 나이가 조금 든 중년 여성들은 건망증이 심한 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탓하긴 하지만 건망증 자체를 심각하게 보지는 않지요.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 건망증을 앓고 있는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나 습관적으로 잊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잊고 삽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잊고 삽니다. 예수께서 묵묵히 걸어가신 그 길을 잊고 삽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전심으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고 온 몸으로 행하신 그 복음을 잊고 삽니다. 무엇보다도 고난 속에 힘겨워하며 눈물 흘리고 있는 내 바로 옆에 사는 우리의 이웃을 잊고 삽니다. 그것도 아주 정기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잊고 삽니다. 무슨 잊고 사는 것이 당연한 삶의 모습인양 아무런 성찰과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곧 길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뻥을 치는 이단자들처럼 우리 자신들도 예수가 복음이며 구원이라고 하면서 예수처럼 살지 않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 정도야 괜찮아 괜챃아하고 받아들여지는 이 건망증의 문화, 이 건망증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에서 5일의 시간 동안 이 군중들의 극단적인 변화 정말 정반대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건망증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라고 외치지만 실은 그 찬양의 대상은 금새 금새 잊어버립니다. 어느 때는 나의 하나님 이지만 그 자리는 금새 물질로, 또 내가 사랑하는 취미로, 나의 일로 바뀌어 갑니다. 마치 호산나를 외치다가 그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에 악을 질렀던 당시의 예루살렘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작년 이 맘 때 인 것 같습니다. '워낭소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들을 보면서 저는 삶과 죽음의 문제, 시간과 기억의 문제 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내 속에 들었던 생각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그 망각으로 인해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또 살면서 겪게 되는 숱한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잊어먹는 능력, 즉 '망각'의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몸이 약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항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나를 괴롭히던 그 녀석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밤잠을 설치고 밤마다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는 상상을 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내가 당한 고통 뿐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기억 또한 잠시도 잊어먹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지옥 같은 상황이겠습니까? 이 자본주의 시대 온 세상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실상 우리가 과식하고 폭식하고 음식쓰레기로 연간 8조원이나 낭비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프리카에 굶주리는 아이들이나 북녘 땅에 굶어 죽고 있는 우리의 동포에 대한 생각이 단 한시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 미안함과 우리 자신의 악함에 대한 자책 때문에 엄청나게 불편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실상 잊혀지기 때문에 조금은 맘 편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타인의 고난도 나 자신이 겪는 고난도 결국 잊혀지기에 우리는 그 망각으로 인해 보호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고통의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것이고 그 망각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다시금 평온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잊어먹는 능력이야 말로, 망각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능력이자 은혜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일 것입니다. 지금 혹시 무언가 힘든 일이 있어 괴로운 교우님들이 이 자리에 계신가요?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곧 찾아 올 망각이 여러분을 평온하게 만들어 줄 때까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먹느냐 그건 아니죠.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하면서 암기하는 것들.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우리가 성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맘 속에 아로 새기려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또한 잊어먹고 싶어도 절대 잊어먹지 못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바로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이라는 건데요 예를 들어 나는 한국인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이관택입니다. 등은 굳이 기억하려하지 않아도 내가 살아있는 한 잊어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사람의 기억에는 다음의 3가지가 있습니다. 1. 잊혀지는 것, 2. 잊혀지면 안되기 때문에 노력하여 잊지 않으려 해야 것과 마지막 3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잊혀지는 것은 실상 중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2번 잊혀지면 안 되기 때문에 애써 그 기억을 부여 잡는 것과 3번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 또 예수님을 찬양하던 그 입으로 예수님을 욕하던 그 군중들, 예수님을 위해 종려 나뭇 가지를 흔들던 그 손으로 예수님께 돌을 던졌던 그 사람들이 변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꼭 부여잡아야 할 가치들을 결국 부여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삶의 철저한 원칙과 기준이 됩니다. 원칙과 기준은 나로 하여금 환경의 지배에 휩쓸리지 않게 굳건하게 해주는 반석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믿음 없음은, 다시 말해 나의 삶의 버팀목이자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은 그의 뜻을 따라 살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리 휘청 저리 휘정거리는 갈대와 같이 내 간사한 마음의 흔들거림을 따라, 수시로 변하는 환경에 따라, 나의 이득과 욕망에 따라 삶의 원칙과 신앙의 법도를 안중에 두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상실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신앙의 건망증으로 그 삶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자꾸 잊어먹는 것이죠. 원래 조금은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었는데, 나도 한 때 '호산나' 좀 불렀는데 지금은 어느 샌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손목에 대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인 이웃과 함께 나누는 ‘생명감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생명감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나를 둘러싼 온 생명의 감각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감히 어찌 나의 친구를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어찌 한 그루의 나무를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어찌 녹색성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슬러건으로 온 국토를 파헤칠 수 있단 말입니까? 생명감각은 우리 내면에서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감수성입니다.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민감하고 예민하게 배려할 수 있는 감수성.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이 바로 생명감각입니다.

5일간의 시간동안 사람들이 변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세 번째는 아마도 이 변화의 기제에 인간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실상 인간의 신앙 자체를 변화 시켜 버리기에 충분합니다. 얼마나 많은 성자, 목사 들이 욕망 앞에 무너져 내립니까? 왜 내가 호산나를 외칩니까? 만약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나의 욕심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결국에 나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를 향한 찬양은 바로 그를 향한 모독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애증이라고 하지요 사랑의 일관성이 깨질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미워지는 것처럼 나의 신앙의 일관성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깨질 때, 나의 욕망과 욕심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때, 나는 극단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망각을 병행하면서 말이지요.

지금의 우리가 사는 이 죽음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극단적인 망각의 매커니즘에 빠져 살게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친구는 중요치 않습니다. 나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도움꾼이 필요할 뿐이지요. 우리에게 편안한 쉼과 겸손을 절로 불러 일으키는 경이로운 자연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개발의 대상이 되는 부동산으로서의 자연부지가 필요할 뿐입니다. 더욱 본질적인 것들이 잊혀져 가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변해가는 시대입니다. 정복의 대상으로, 이용의 대상으로... 함께 일하며 창조적 노동 영성을 나누었던 직정 동료가 이제는 소모품으로 사용됩니다. 그의 가치는 다만 이윤을 창출하는데에만 국한 됩니다. 원래 안그랬는데 자꾸만 변해갑니다. 내 마음이, 우리의 모습, 삶의 형태가 자꾸만 잊혀집니다. 하나님이 계획한 원래의 삶, 우리의 본연의 정체성이 자꾸 잊혀집니다 변해갑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사순절과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 사건은 바로 자꾸 변해가고 잊혀지는 우리의 마음을 2000년 전 온몸과 온 맘 다시 말해 온 삶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생생하게 생각나게 하는 시간입니다. 잊혀져가는 나의 마음 하지만 이 시간 우리는 다시금 우리ㅏ 가지고 있는 생명감각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다음 주 부활절연합예배는 우리에게 본연의 정체성을 회복 시켜 줄 것 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생명감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 진정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의 제자들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 우리를 둘러싼 삶의 모습 속에서 건망증에 걸려 하나님을, 또 우리 주변의 고난 받는 이웃을 잊고 지내셨다면 다가오는 부활절, 진정한 부활 사건을 경험해 보기 위해 준비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번 한 주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감해 보시면서 하루하루 세밀하게 주의 삶과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17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3/21) 좋은만남 2010.03.22 548
616 [깨어나십시오] 두려움-공격성의 뿌리 좋은만남 2010.03.22 576
615 기쁨으로 서로를 섬기는 교회 / 누가복음 10:38-42 방현섭 2010.03.23 770
61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3/28) 좋은만남 2010.03.30 578
613 [깨어나십시오] 깨달음과 현실 접촉 좋은만남 2010.03.30 793
» '건망증' / 마태복음 21장 6~11절/ 마가복음 15장 11~15절 좋은만남 2010.03.30 1022
611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4) 좋은만남 2010.04.05 759
610 [깨어나십시오] 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1 좋은만남 2010.04.05 746
609 우리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 레위기 11:44-45 방현섭 2010.04.11 872
608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11) 좋은만남 2010.04.13 738
607 [깨어나십시오] 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2 좋은만남 2010.04.13 837
606 거북이와 장애인 / 갈라디아서 3 : 23~29 좋은만남 2010.04.19 987
605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18) 좋은만남 2010.04.19 804
604 [깨어나십시오] 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3 좋은만남 2010.04.19 780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