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6일 성령강림절 제17주 및 농촌선교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당신의 모든 순간'
이관택
본문: 욥기 5장 9~16절
9 그분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다. 10 땅에 비를 내리시며,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11 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며, 12 간교한 사람의 계획을 꺾으시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 13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제 꾀에 속게 하시고, 교활한 자들의 꾀를 금방 실패로 돌아가게 하시니, 14 대낮에도 어둠을 만날 것이고, 한낮에도 밤중처럼 더듬을 것이다. 15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칼날 같은 입과 억센 손아귀로부터 구출하신다. 16 그러니까, 비천한 사람은 희망을 가지지만, 불의한 사람은 스스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오늘은 농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가을농활을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반나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이곳에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요. 하지만 한 해 농사가 마무리 되는 이 시점, 직접 농촌 현장에 와서, 자연을 만나고, 결실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 또 이를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정말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워진 농촌의 현실을 볼 때, 우리는 단순히 나들이 차원으로 와서, 운동삼아 주어진 일을 하다가 가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일구는 농촌을 위해서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창조질서를 위해서 온몸으로 기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바라옵기는 우리가 노동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들려오는 새소리를 통해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통해서, 우리 서로에게 보여지는 미소와 아름다운 몸짓들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시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번 추석연휴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연초의 구정이 주일을 끼고 있어서 연휴가 짧았던 반면에, 이번 추석 연휴는 길어서 인지 오랜만에 사람들의 얼굴표정에서 여유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비도 많이 와서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도 있었구요.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일례로 우리 교회 강경숙 집사님 댁에도 작은 화재가 났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은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살기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방향감각조차 모조리 상실해 버린 우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돌아다 볼 수 있는 아주 금쪽같은 기회가 됩니다. 이번 명절을 통해 여러분이 그 동안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발견하셨는지요?
저는 이번 추석에 오랜만에 많은 가족 분들을 만났습니다. 평상시에 가족들을 거의 의식하고 살지 않기 때문에, 사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다지 진한 가족애나 애틋한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만, 가족들을 만날 때 참 신기한 경험들도 합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릴 적 모습들을 이야기 하시고, 나이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의 5~6살 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시는 데요. 그 때 제가 밤에 오줌을 싸서, 다음 날 키를 머리에 쓰고 동네 이 곳 저 곳을 배회하며, 소금을 얻으러 다녔던 이야기, 동네 얘들한테 맞고 들어와서 울보마냥 울었던 이야기, 유난히 예민했었는지 밤마다 새벽에 깨어나서 벽이 무너진다고 벽을 부여잡고 잠꼬대를 했던 이야기 등등 약간은 낮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지만,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가족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주요 레파토리 중의 하나입니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이제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그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지요. 가족들의 모습도 저의 모습도 변해 가는데, 나이도 들어가고, 하나 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이 생기고, 손자, 손녀가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대화하는 분위기, 또 대화의 주제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은 변해 갈 지 모르지만 옛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만큼은 마치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추석연휴 내내 '죽음'이란 단어를 부여잡고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은 멈춰버린 것 같지만, 실상 너무나 빠르게 흘러서, 오줌싸개 어린아이는 이제 서른을 넘기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단칸방에 살림집을 차렸지만, 세상 그 어떤 커플보다 젊고 아름다웠던 그 신혼부부는 이미 중년을 훌쩍 넘어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때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친구들도, 존경했던 어르신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20대 한창 때의 그 순간들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 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 이야기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청춘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빠르고 우리 인간이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또 죽어가는 존재 아닌가! 아무리 잘난 사람이든 뛰어난 사람이든 결국엔 죽어서 이 땅에서 삭제되어 버릴 운명 아닌가! 여러 가지 질문들이 내 속에서 넘쳐 났습니다. 사실 너무나도 한정된 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추석에 가족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면서 '죽음'을 상상하고 고민하다니 참 이상한 노릇이지요.
어린 시절 제가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했던 경험은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그 때는 국민학교 였는데요, 그 때 키우던 강아지 뽀삐가 제 눈 앞에서 차에 치어 죽는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삽을 가져와서 아직 숨을 헐떡이는 뽀삐를 땅에 묻었지요. 너무나 사랑했던 뽀삐가 흙 속에 가려지고 사라지던 그 순간, 어린 저는 '죽음'의 모습이 매우 끔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전 까지 함께 뛰어 놀던 한 생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신학교에 까지 들어갔던 배경에는 늘상 이 '죽음'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려웠고, 회피하고자 했으며, 해결하고자 하나님께 엎드렸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죽음'의 문제를 늘상 인식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늘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습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의 고민을 시작으로 더 이상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이 실존적인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농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제가 까닭 없는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농촌이야 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놀랍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창조질서의 신비가 가장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곳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창조질서의 신비는 심고 나고 자라고 열매 맺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바벨탑을 쌓듯 인간의 의지로 계산하고, 이론과 철학을 쌓아서 만들어낸 도시문명 속에는 자연스러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강아지풀에서 느껴지는 푸릇푸릇함이 간직한 신비로움은 강아지 모양의 로봇이 가지고 있는 흥미로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농촌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소멸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소멸 하는 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걸음이 되는 또 다른 진화와 성숙의 모습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을 거슬러 기계문명 속에서 뭔가 어색한, 그러면서도 억지로라도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은 태어나는 것도 좀 비정상적으로, 죽는 것도 비정상적으로 여기는 그런 문화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출산율을 이야기하지만,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온갖 건강검진과 건강 보조식품들이 판치는 시대, 현재 우리들의 삶을 볼 때, 자연스러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다가 농촌에 온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해 보자는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 삶의 처음과 끝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여러분의 처음과 여러분의 끝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신비!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가득한 이 농촌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삶의 처음과 끝을 상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랍비가 있습니다. 이 분은 '상상'과 '생각'이라는 말은 가히 신앙적인 표현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경이롭다' '놀랍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신비를 대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탄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장엄한 해돋이를 보는 그 순간의 나의 느낌과 생각, 몸의 떨림을 상상해 보시면 비슷할 것입니다. 말로만도, 느낌으로만도, 몸으로만도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그러한 경이로움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마주합니까?
결국 인간은 자신의 한계 상황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그렇고요,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나의 욕심과 몸부림을 멈출 때야 말로, 하늘에 솟아 있는 태양의 경이로움과 구름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욥기에서 "그분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지혜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이한 일'은요, 또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은요.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주의적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부분이 바로 신앙의 신비이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 만이 깨달을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신앙인은 이 신비의 영역을 우리 삶의 순간순간 발견해 내고, 경이롭다!, 놀랍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곳까지 오시면서 여러분은 순간 순간 무엇을 보았습니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매 순간 하나님의 신비가 우리를 감싸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요?
사람이 마음이 부산할 때, 집중하지 않으면 많은 것들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또 마음 문을 닫아 놓고 있을 때는 어떤 이야기도 그 마음을 두드리지 못합니다. 흔히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내 손이 그 바람의 결을 느끼면 그 바람은 나에게 바람결이 됩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굴 때에야 그 물결의 흐름과 세기를 직접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비와 나의 마음문이 서로 공명 할 때 비로서 그 '순간'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이 되고 기억의 소중한 조각이 됩니다.
홍천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시면서 목회를 하고 계신 박순응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평생 도시에서만 살다가 막상 목회를 시작할 때, 시골로 오게 되었는데, 이왕 온 김에 직접 농사를 짓자 마음 먹으신 것이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농촌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은 항상 자신이 너무 많이 배운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경험담을 많이 이야기 하십니다. 목사님께서 목회초년 가장 좋았던 시간이 새벽기도 차량운행하던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차량운행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놀라운 깨달음과 하나님의 은혜 체험을 많이 하셨답니다. 하루는 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새벽에, 목사님께서 "오늘은 별이 많이 보이는 걸 보니 날씨가 맑은가 봅니다"라고 말하니까 한 할머니께서 "저건 날씨가 맑은 게 아니라 달이 어두운 겁니다. 달이 밝으면 별이 보이지 않지요."
사람들은 달과 같은 뭔가 크고 엄청난 경험을 소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달에 가려 이미 나의 삶을 가득 메운 수많은 별과 같은 순간순간을 잊고 지날 때가 맣이 있습니다. 실상 하나님의 신비는 별과 같이 우리 삶을 가득 메우고 있건만, 아직도 하나님께 불평을 한 가득 가지고 사는 게 우리들 아닌가요?
오늘 창조질서가 가득 담긴 풍경들,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순간 별과 같이 우리 삶을 가득메운 하나님의 흔적들을 살펴보시고 경이롭다, 놀랍다. 고백하시는 순간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