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 포럼
“우리 교회의 미래상 그리기”
좋은만남교회 담임목사 방현섭
들어가며
1985년 서울시 은평구 불광3동 느티나무 앞 건물 2층에서 시작한 신성교회, 이제 이름을 좋은만남교회로 바꾼 우리교회는 어느덧 만 스물네 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한 교회가 창립되고 24년이면 사반세기의 세월동안 존재하였으니 결코 짧다고 할 수만은 없는 시간입니다. 이 긴 시간 중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가 함께 한 것은 십 년가량 됩니다. 최소한 우리가 함께 보낸 십년 동안에는 많은 진보와 성숙이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하실 임대예배당을 청산하고 예배당 부지를 마련,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공간적 거점을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4년 동안 지역시민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함으로 나름대로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지난 24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24년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자리는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장입니다. 그저 하나의 개신교회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면 이런 자리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만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서 있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가 공감하며 모두가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써 존재할 수 있는 비전을 발견하고 마련하는 제안들이 나오기를 바라며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서
Ⅰ. 교회의 존재목적
1.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그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교제하며 선행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목적을 가질 근거가 없습니다. 교회는 더 큰 의미의 하나님 나라로 대체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를 한시적 공동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개념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은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오고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은 언제라도, 심지어는 내일이 종말의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최대한 성실하게 복음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염려는 오늘 하루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십니다. 오늘은 오늘 먹을 만큼의 만나를 거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한 재물을 쌓는다거나 미래를 위한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교회의 참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을 최대한 성실하게 사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오늘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우주인이 우주선을 타고 어느 날 갑자기 지구 상공위에 나타나듯이 외부에서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오는 나라가 어떤 나라가 아닙니다. 또한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어떤 알 수 없는 차원의 세계, 시공간만으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고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삶의 가운데로 찾아오셔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기를 원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유대교의 한 부류로 시작했던 기독교는 종말이 지연되자 자체적인 교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때 교리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고정화되고 고착화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담겼던 역동성은 사라지고 고정된 교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도 교리화되고 고정화되어 저 먼 곳의 어떤 나라로 규정되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쓸 데 없는 말과 행동을 너무 많이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찾아 이루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 많은 사람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셨다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성서 본문에 근거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전도를 위한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운동은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도는 알맹이 없이 껍데기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지칭하는 교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존재목적이 돼버렸습니다. 왜 모이고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결국 목적과 과정이 전도되고 끊임없이 자체순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왜 전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라는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연민과 애정으로 살다 가신 분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을 많이 모으라고 했다면 그건 연민과 애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라는 것이지 제도적 종교의 교세를 확장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두 연민과 애정으로 살아간다면 그 나라는 이미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진 것을 나누며 공동생활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만약 예수운동이 모여 기도한 백 몇 십 명만이 아니라 온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에 퍼졌다면, 그들이 모두 자신의 가진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나누어 쓰고 통용했다면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할 이들을 더 많이 찾아내고 그들이 이 세상의 악한 사상과 풍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교육하고 길러내야 합니다.
4.교회는 선한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일을 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면서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자 각 교회에 도움을 요청해 기금을 마련해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각자의 소유를 팔아 공동으로 나누어 쓰면서 모두가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비다라는 여인도 선행으로 주위의 칭찬을 많이 받은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중요 단락이 끝날 때마다 믿는 사람의 수가 더해지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칭송을 들었다고 후렴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동체 내부가 아닌 외부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외부인들에게도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서로 돕고 선행을 하는 것이 외부인의 눈에 칭찬꺼리로 비쳤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예수님도 줄기차게 선한 행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순수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갇힌 자, 가난하고 굶주린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본 것이 바로 자기를 돌아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5.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공동체만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단 한 순간도 종교적인 모임으로만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오신 것도 세상의 한 복판입니다. 예수님이 일생동안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했던 것도 역시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감리교회는 더욱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웨슬리는 성도의 개인적인 성화와 더불어 사회적 성화를 중요한 신앙의 한 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개인적 성화가 사회적 성화와 함께 갈 때 온전한 성화를 이룬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에게 연민을 갖고 구제하는 일뿐만 아니라 가장 세속적인 영역이라는 노동자문제, 음주문제, 정치문제까지도 깊이 관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와 경제적 여건이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윤리도덕적인 차원도 정치와 경제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난당하는 이들이 있고 경제적인 이유로 소외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적 불의를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정의, 종교적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야 말로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등 사회적 이슈가 종교 외적 영역이락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비성서적이고 반 신앙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은 운용하셔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영역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교회는 세상을 향한 통로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Ⅱ. 교회의 현실과 미래
1. 한국교회의 현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존경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수없이 생겨나는 인터넷 안티기독교 사이트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입고 이탈한 이들은 교회의적대자가 되어 교회를 공격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귀하게 대우하지 않고 머릿수, 교회의 수입원 정도로만 여깁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전도에 능한 사람과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교회에서 우대 받는 현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돈 없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 교회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막대한 헌금이 매주일 걷히지만 선한 사업에 쓰기보다는 자체의 몸집을 불리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교회를 사적 소유처럼 여겨 자식들에게 교회재산을 물려주고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데 혈안이 돼있습니다. 게다가 시대는 바뀌고 있는데 여전히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만 천착하고 있어 합리성과 논리성을 바탕으로 한 현대의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구성원만이 아니라 교회 외부인들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큰 교회가 있는 지역은 교통대란, 주차대란을 겪습니다. 국민들은 주거대란을 겪는데 교회는 주변의 주택을 하나하나 매입하여 영토를 넓히고는 주차장으로 사용합니다. 평일에 지역 주민에게 주차장을 개방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국민적인 상식과 여론과도 엇나갑니다.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실정하고 있는 대통령을 가장 격렬하게 두둔하며 대통령과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좌익, 빨갱이라고 매도합니다. 교인들에게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서 정작 목회자들은 정치적 인사들에게 선을 대려고 각종 국가조찬기도회를 앞 다투어 개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보존하라는 청기지적 사명을 받은 교회가 오히려 생태환경을 보존하는 사회적 추세를 거슬러 막개발 정책을 지지합니다.
물론 교회의 바른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작은 일이나마 실천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지역사회 어린이들을 돌보고 노인과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교회, 정치적 행동으로 잘못된 정책을 바꾸려는 교회 등 좋은 일, 교회가 이 시대에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대의 교회가 잘못된 가치관에 빠져서 오로지 대형교회만이 본받을만한 교회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정작 귀한 일을 하는 교회는 부각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좋은 교회는 작은 교회, 눈에 띄지 않는 교회로 남아 있습니다. 반회는 계속해서 내외적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2. 교회의 미래
지금 한국교회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한 때 1,200만 성도를 헤아렸지만 이제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으며 다른 종단에 비해 현격하게 이탈자와 비판자가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교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한 건물 건너 하나씩 교회가 있습니다. 신도시의 경우에는 한 상가건물에 서너 개씩 교회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을 모시는 형제들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무한경쟁 게임에 빠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치 기업들이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도산하느냐의 러시안 룰렛 게임에 몰두하듯이 교회도 죽느냐 사느냐의 경쟁체제에 들어섰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경쟁의 흙탕물 싸움이 사람들 눈에 한 번 가 볼만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무 성장한 것이 성장을 멈추게 하고 오히려 쇠퇴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지만 한국사회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지경입니다. 역사에 진행에 반동하는 세력의 중심에는 불행하게도 교회가 있습니다.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 있지만 역사는 인류의 능력과 더불어 자주성과 의식성, 민주성을 계발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와 억압이 끊임없이 시도될 것이지만 과거와 같은 큰 힘을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류의 민주주의 의식은 더욱 고무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 진행방식, 인류의 보편적인 상식과 양식에 역행하는 것은 세계와 싸우겠다는 것 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과 같겠지요.
한국의 인구 노령화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인구 노령화는 더욱 심각합니다. 지금 교회를 지키고 있는 성도들의 반 이상은 노년층입니다. 역사가 깊은 교회, 농촌으로 갈수록 교회의 노령화는 심각합니다. 그러나 청장년층, 청년층은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젊은 인구를 붙들어 둘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정책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만 지나면 한국교회는 눈에 띄게 늙어 있을 것이고 공간은 텅 비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 수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교인수도 줄어들겠지요. 한국교회는 소위 잘나가는 교회 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멸종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만을 위한 공동체로 남게 될 때 더욱 고립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3. 미래의 성숙을 위한 전제조건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으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 그대로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외의 것은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행하기 위해서 돈과 사람이 필요한 것인데 요즘은 돈이 필요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지, 돈과 사람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고 행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 그 말씀을 따라 살았던 예수님의 삶을 현재에서 재현하고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쇠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투적인 선교와 적극적인 전도로 살아남을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더욱 교회가 전도에 집착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교회는 임시적인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임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려는 순간에 불법과 반 복음이 태동됩니다. 교회가 살아남아 존경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은 우리들의 몫은 아닙니다. 그저 복음대로 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라는 임시적이고 유보적이며 신앙적인 관점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순수성을 잃고 장사가 돼버릴 것입니다.
교회가 잠자는 인격과 잠든 영성을 깨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교육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사람은 현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항상(恒常)적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을 개혁하거나 복음을 배우거나 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복음적 책임을 생각나게 하며 잠자는 지성과 영혼을 깨우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적 실천은 신앙적 앎을 전제로 합니다. 교육은 언제 어디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람, 좋은 동역자, 좋은 이웃을 발견하고 신앙적 동지로 삼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와 소통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어느 부문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로 형성되었습니다. 과거처럼 수도원에만 처박혀 신앙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불교 사찰도 산중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교회가 사회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동반자로 맞아 함께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을 위해서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상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세속적이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것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깨닫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과 속의 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하고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을 누리는 단일한 이중성이 요구됩니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어느 편에 서게 된다는 상황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정치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권력을 지향하고 권력자들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병들고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중도라는 틀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민중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목표점을 향해 나가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정치적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교회의 일만 알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일, 정치적인 내용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Ⅲ, 우리교회의 현실과 전망
우리교회는 현재 결산규모 3,000만 원 선의 미자립교회로 분류되며 현재 주일 출석인원이 20명 미만의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장점이 있으니 우선 고정화된 교회의 노쇠하거나 권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젊고 지역 친화적이며 민중친화적인 교회의 이미지로 지역사회에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 환경을 살리는 교회, 어린이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총 60여 평 2개 층의 공간을 갖고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장점입니다. 좌식과 입식으로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모임과 회의를 위해 효율적이고 교육을 위한 다양한 자재와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소규모의 모임을 하기에는 매우 좋습니다.
많지 않은 교우들이지만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뿐 아니라 신앙인으로써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자 장점입니다. 우리교회의 교우관계는 기복적인 신뢰나 개인관계, 거래관계로 인한 신뢰가 아니라 신앙적인 신뢰라는 것이 더욱 긍정적인 요인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확립하는데 대한 열망도 많고 구체적인 실천도 있으니 기존 인적 자원은 매우 유능합니다.
그러나 풀어야 할 과제도 있습니다. 우선 좋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소요된 부채입니다. 이 부채는 상환하는 것이 교회재정의 안정성과 활동자금을 마련하는데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요원한 상태이고 언제라도 상환 압박이 들어올 수 있으니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적역량의 부족이 매우 큰 단점입니다. 성도들의 생활지역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직장생활 등으로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운 점을 고려한다면 인적역량의 확충이 매우 시급한 편입니다. 그러나 인적 역량의 확충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기에 이에 대한 확대는 매우 요원한 상황입니다.
위와 같은 장단점을 고려하여 교회의 미래상을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보완할 수 있도록 하고 지역사회라는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고육 프로그램을 확충하면 미래는 어둡지만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이 지역은 다행히 재개발 문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역사미관지구이면서 또 수국사라는 불교 사찰이 넒은 땅을 차지하고 있기에 택지개발이 쉽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재개발의 위험 없이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선교 및 목회,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이 워낙 외지다보니 지역 내에서 인적역량이 확충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민과의 접촉에서 나타날 마찰로 인한 한계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적인 기반은 갖되 지역민을 전적인 전도대상으로 하는 것은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신 지역사회 전반의 문제, 예를 들어 구정, 구내 생활보호대상자, 구내 시민단체 등과 연계하는 일을 통해 지역적 거점을 마련한다면 지역 내 선교도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Ⅳ. 좋은만남교회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 제안
1. 예배
예배순서와 내용, 교우들의 자발적 참여, 교육프로그램 기획
2. 교제
연내 친교행사 계획, 속회, 야외활동 계획
3. 지역
지역사회 모니터링, 지역시민단체와 연합, 지역 성서연구
4. 사회
사회참여를 위한 조직, 계획수립, 지원 단체 및 방법
5.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