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서 DVD방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이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한참을 고민 한 후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우리... 귀농할래?
그러자 아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있게 말했다.
“어. 나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야!”
그래서 그 부부는 서울에서 살던 아파트를 팔고 사업을 정리하고 충북 음성으로 귀농을 하였다.
그런데 그해 말, 아파트 값이 폭등하여 남편의 배가 은근 아파오자, 아내는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괜찮아 여보, 그거 원래 우리 돈 아니잖아.”
감리교청년전국연합회(이하 감청)에서 주관하는 “내 인생에서 완전 아름다운 일주일” 청년체험 수련회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입니다. 작년엔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지만, 올해는 감청사무국 간사로 갔다왔습니다.
매년 10명 가까이 참여하여 농촌봉사활동을 갔지만, 이번에는 각자 저마다의 사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고 사무국 식구들 3명이서 충북 음성에 있는 농촌선교훈련원으로 떠났습니다. 당일 장마 소식에 은근 걱정을 했지만, 장마라고 하기엔 비가 겨우 이틀밖에 안왔습니다.
인원이 많았으면 여러 가정의 일손을 도울 수 있겠지만, 인원이 3명뿐이라 가장 일손이 필요한 한 가정만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 가정은 위 이야기의 주인공 ‘남 집사님’ 댁의 일이었습니다(이야기속 아내는 제 이상형). 거의 한달동안 허리가 안 좋아 치료를 받느라 일을 쉬었다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남 집사님과 남 집사님의 아내 되시는 분 밖이 없는데, 방대한 분량의 고추 밭이 있었습니다. 둘째날 교회학교 총무 임원 형이 왔습니다. 그날의 할 일은 다른 밭에 있던 파이프 대를 빼서 트럭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파이프 개수가 대충만 봐도 500개가 넘어 보이는데 실수는 훨씬 많았을 겁니다. 그걸 빼서 트럭으로 옮기고 다시 다른 밭에 옮겨 놓는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시원한 수박과 막걸리 한잔을 걸쳐보지만, 6월 중순의 강렬한 햇살에 갈증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원이형 없었으면 일을 2배로 했을 거였습니다. 원이 형이 가던날 이제 남은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근심 걱정이 2배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파이프를 옮긴 밭에서 망치를 가지고 고추대를 세웠습니다. 파이프 하나를 박는데 망치로 예닐곱번을 쳐야 합니다. 몇천번을 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이 아려오고 감각이 사라지더니, 손에 물집까지 잡히고 어깨와 팔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오후 남기평 전도사님께서도 지원을 오셔서, 그나마 일손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정말 큰 밭이었습니다. 젊은 사람 7~8명은 있어야 일을 좀 할 수 있을 듯한 밭인데, 작년에 이 밭을 남 집사님 댁 아들이 파이프를 옮기고 박는 작업을 혼자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하는 말이 “난 일년에 2~3일만 고생하면 되는데 엄마,아빠는 농사짓는 내내 고생해야 되는데 이정도는 별거 아니야” 라고 합니다. 남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저도 고향에서 두분이서만만 일하시는 부모님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더 열심히 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집은 농약이라도 치는데, 이곳은 유기농으로 재배해서 약도 안치고 배로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날 잡초를 베는데, 일을 피곤하게 오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2줄 정도의 잡초를 베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똥싸고 휴지 안 닦은 느낌에 찝찝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더할 기운도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점심을 남집사님 댁에서 삼계탕을 준비해 주셔서 맛있게 먹고 돌아왔습니다.
저도 매년 두세번 정도 집에 내려가서 일을 도울때마다 농사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부모님도 농사를 그만둘 수만 있으면 그만 두겠다는 말을 자주 흘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농부들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농사의 가치가 인류 최고의 가치라는 말이 낭만적으로 썩지만 않길 바랍니다. 부디 올 한해 가뭄이나 장마로 인해 농작물의 피해가 없길 기도합니다. 시원한 바람과 알맞은 비로 농부들의 땀을 식혀주며, 풍년 되는 한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