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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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일 강림절 제4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아니다. 너는 웃었다

이관택

 

본문: 창세기 18:10-15

10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3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진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가장 생각납니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10초 생각할 시간을 드릴테니까 빠르게 한마디씩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성탄절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배가 산만큼 나온 마리아를 요셉이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이들은 베들레헴이라는 곳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사렛에 살고 있던 이들이 베들레헴에 온 이유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호적을 등록하기 위함입니다. 막상 천신만고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는데, 글쎄 호적을 등록하러 온 사람이 많아서 여관방을 찾을 수가 없네요. 마리아는 이제 출산 때가 다가와서 진통이 시작됩니다. 남편인 요셉은 피가 마르겠지요. 이 여관 저 여관을 뛰어다니면서 절실하게 부탁한 끝에 한 여관 주인이 그럼 마굿간이라도 괜찮겠냐요 말합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마굿간으로 들어가죠. 냄새도 나고, 낙타며, 말이며. 온갖 짐승들 울부짖고, 더운 나라라서 벌레들도 바글거리는 그런 더러운 마굿간에서 마리아는 아기 나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한편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서는 동방 박사 세 사람이 특이한 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별을 쫒아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지요. 또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를 만나서 아기예수가 탄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마굿간에 찾아옵니다. 그들이 마굿간 안에 들어갔을 때는 가장 천한 말구유에 누인 빛이 번쩍이는 아기를 보게 됩니다. 그 아기가 바로 우리를 구원할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그 아기에게 거룩하게 엎드려 절하고, 동방박사 세사람은 값진 예물도 바치면서 경배합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더러운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엄청난 학식과 권력을 자랑하는 동방의 박사들도, 거칠기로 소문난 목자들도 엎드려 절을 하는 광경, 그 때 음메 음메하던 소와 나귀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조용히 하면서 경배를 했겠지요. 밤 하늘 별들은 반짝이고, 천사들은 노래하고, 참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보고 어떤 학자들은 성서에 있는 짧은 몇 개의 구절을 사람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길게 늘어뜨린 것에 불과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뭔소리인가 하고 살펴보니, 실상 성서에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 본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렇게 두 복음서 밖에 없지요. 또 성서구절도 굉장히 적은 분량입니다. 그나마 많은 부분이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하거나,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임신할 것이라고 알리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여관도 마굿간도 나오지 않고 그냥 집으로 나옵니다. 또 마태복음은 원래부터 이들이 베들레헴에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호적을 등록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세 사람으로 알고 있는 동방 박사들의 숫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한편 동방박사들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목자들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데,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오고, 마굿간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이야기는 그 내용도, 관점도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아는 성탄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적절히 짬뽕해서 만들어낸 이야기 또는 상상해낸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첫째로, 그렇게 수많은 성탄절을 지내왔건만, 각 자의 나이만큼 성탄절을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아기예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제대로 관심 갖고 집중해서 읽어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두 번째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다른 두 개의 성탄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있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기록하지 않았을까? 과연 무엇인 진실인가?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고민에 도달하게 되지요. 과연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임신한다는게 가능한가?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이 아기에게 경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을 파고든다면,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일 수도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믿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많은 학자들은 아기예수 탄생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이 문자들 너머의 진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기 하고 싶은 속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뜻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밤에 태어나셨을까요? 낮에 태어나셨을까요? 고요한밤 거룩한 밤이라는 노래를 들어도 그렇고, 동방박사가 별을 쫒아왔다는 이야기를 봐서도 밤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죠. 하지만 성서 어디를 봐도 눈이 왔다는 이야기가 없고요. 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아기예수는 흰 눈이 펄펄 휘날리는 그런 춥고, 어두운 한밤중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만드셨습니까? 바로 빛을 만드십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빛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아기예수의 탄생이야기가 없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19절에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빛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혼돈과 어둠을 빛으로 덮으신 것 같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의 어둡고, 혼돈한 땅에 빛을 밝히고,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금 세워나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시작이 이러하니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탄이야기의 진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대로 바로 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 의인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절망에 휩싸인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자! 바로 마음이 곤고하고 궁핍한자, 너무 힘들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는 천국이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 아니십니까? 바로 흰 눈발이 휘날리는 것 같은 암담한 세상, 언제 새벽이 올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아주 캄캄한 한밤중과 같은 현실에서 빛이 얼마나 절실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어둠을 가르고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귀하고 천한 신분이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이고, 짐승이고가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오시는 데 빛으로 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빛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빛 공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깃불, 네온 싸인들이 번쩍이지만, 실제 1800년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밤에 완전한 어둠 가운데 살았다고 합니다. 촛불이라도 켤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왕족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완전한 어둠, 시간도 가늠할 수 없고,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서 날이 어두워지면 그저 죽은듯이 누워있어야 하는 당시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의미였겠습니다.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의 돌파구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그런 의미였다는 것이죠. 완전한 반전! 어둠이 빛으로 바뀌고, 권력자가 어린 아기에게 무릎을 꿇고, 천하디 천한 목동들과 귀하디 귀한 동방의 박사들이 함께 거룩한 경배의 시간을 갖게되고,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되는 그 날 그 마굿간이 그자체로 바로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매일이 캄캄한 밤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어둠의 존재는 어떻게 생겨 먹었습니까? 무엇이 내게 어둠입니까? 중요한 것은 어둠의 종류가 무엇이든, 눈이 오는 추운 밤이든, 바람이 쌩쌩불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빛이 등장하는 순간 어둠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림절 우리는 바로 이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어둠이 사라질때까지요.

 

 

위대한 탄생

 

성서에는 유난히 신비한 탄생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대표적이지만 100살이 다된 노년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이야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모세의 탄생이야기, 불임이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이야기 등등 수많은 탄생 이야기가 등장 합니다. 이 탄생 이야기는 실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위대한 탄생이라는 말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년 이맘 때, 내가 너를 다시 찾아 올 것인데, 그 때엔 너와 네 부인 사라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을거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때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에 가까웠고, 사라도 나이가 많아 월경도 그쳤을 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완전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이죠. 그렇게 젊고 왕성할 때도,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일입니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죠. 그래서 포기하고, 이방여인이었던 하갈을 첩으로 들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보지 않았습니까?그런 아브라함에게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이 때, 지나가던 사라가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듣고 뭔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중얼거리면 웃는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개콘에 비상대책위라는 프로그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무슨 일만 벌어지면 안돼! 부터 소리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안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인데, 참 타당합니다. 누가 봐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옆에 앉은 뚱보는 사람 부르라고 희망이라도 갖지만 말입니다. 역시나 안되겠지요.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안돼! 말도 안돼~ 그 때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약간 빈정이 상하셨는 듯 합니다. 그러자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합니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너는 웃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라는 이삭을 낳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창세기 216절을 보면 사라가 이삭을 낳고 혼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서 말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웃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하나님께서 꿈꾸는 세상은 웃긴 세상입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사라가 이야기 한 것 같이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되게 웃긴 이야기이죠. 또한 어둠에 빛이 온다고? 이 캄캄한 밤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절망 밖에 없는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전쟁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웃기는 얘기 하고 있네.

신앙인이 우리들 조차 웃지 않는다고 뻥치지만 속으로는 뭐 되겠어? 예배드린다고, 착하게 산다고,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뭐되겠어? 안돼~ 하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더군다나 이 문제가 조금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일 때 우리는 더욱 빨리 포기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 비정규직을 대량해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장애인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이 차별을 당하면 뭐 어쩔 수 없지. 여성들이 차별당하고 그러다가 법들이 만들어 질라치면 뭐 되겠어? 남녀평등 웃기고 있네. 삶의 다양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비웃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 아닙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잇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상상하지 못할 반전을 보여주실 것을 말입니다. 또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의 가치로 풍성한 하나님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사라처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 뭐 이런 얘기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런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입니다.

 

절실한 기다림

 

다음 주 성탄절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연합예배가 있습니다. 올해는 1500일 가까이 거리 농성을 하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자들을 위해 마음을 모읍니다. 1500일이면 만4년입니다. 그 기나긴 시간동안 12명 밖에 안되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12명 밖에 안 되는 노동자가 엄청난 교육자본인 재능교육을 상대로 싸운다고 생각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웃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약하고, 절망가운데 있는 소수의 노동자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지를 기대하기를 소망합니다. 정의와 생명의 하나님께서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이번 사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수많은 기독인들이 그 일을 위해 마음으로 모아 고대하고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림절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이 은혜가 가득한 절기에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또 거대한 힘과 권력에 기가 죽어 ~ 안돼~ 라고 말하면서 비웃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룩하고,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다리시길 원합니다. 또 함께 가서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품안에서 사라가 경험한 깨달음과 진정한 웃음을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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