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29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본문 : 창세기 2:9,16-17

9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제목 : 결국 시간이 열쇠입니다.

설교일 : 2013616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절후 제4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모든 민족을 창조하시고 또 사랑하시며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민족의 화해와 화합은 물론 온 인류의 평화를 간절히 소망하며 예배하는 자녀들 위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는 6.15남북공동선언 13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3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손을 잡아 번쩍 들어올리면서 환하게 웃던 모습을 어려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반세기가 넘게 대립과 대결을 일삼던 우리 민족이었는데 남북이 마음을 합하니 10년 동안 서로 왕래하고 관광도 하고 경제협력사업도 하면서 , 이런게 평화고 또 통일이구나하며 평화통일을 미리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5년 동안은 언제 그런 10년이 있었던가 까맣게 잊을 정도로 다시 대결과 반목, 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에는 남북이 대화를 하자고 시도하였지만 아쉽게도 쓸데 없는 자존심 싸움, 샅바싸움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국민들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과 바램이 위정자들의 하찮은 명분보다 못한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올해는 한국전쟁의 정전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가 매일 평화와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잠시 중단, 음악을 듣다가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재시작 되는, 즉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그나마도 얼마전 북한은 정전협정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였으니 이제 어느 쪽이든 언제든지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완전한 평화가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의 상태로 전환하자고 시민사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는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더 나아가 북-미 간의 평화협정을 맺고, 남북간에도 평화협정을 맺으면 한반도의 위기는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을 맞고 또 서로 험담하며 매치하는 상황을 경험하자 남북 간에 맺었던 6.15남북공동선언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이기만 한, 그러면서 끝도 없는 불안으로 이 민족을 쳐박아 넣는 이 대결이 속히 끝나고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이 이행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평화의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서 :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는 성서에 두 가지 유형이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하고 시작하는 11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하고 시작하는 24절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연결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맨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에 자연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아담)을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동산의 중앙에 두 나무를 두시는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이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필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규정합니다. 두 나무 열매를 모두 못 먹게 한 것인지, 아니면 선악과라는 것만 못 먹게 하신 것인지 성서에서는 불명확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의 지성,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322절에 따르면 영원히 살게 하는 것, 즉 무한한 생명, 무한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손오공 이야기의 천도복숭아랑 비슷하지요~ 저는 성서를 읽으면서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지성, 지혜가 없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가? 순종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만 인간이 지성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 인간에게 지성이 생겼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가 아닐까?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은 그저 지성도 없이 동물 중에 하나, 동물들보다는 조금 더 우위에 있는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공감도 하지 못하겠고 이해도 하지 못하겠고 저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창조이야기는 꼭 그렇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처해있는 이 모순적인 상황, 인간이 동물에게는 없는 지성을 갖게 된 순간부터 고민과 번뇌,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는 현실, 지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잡다단하게 된 인생의 원인을 고대유대인들이 신화적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지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성은 있으나 시간은 갖지 못하여서 인간은 인간으로 머물게 됩니다. 지성에 영원한 생명, 시간을 지배하는 능력까지 갖게 된다면 그것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 고대유대인들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시간도 지배할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고 시간의 문제만 지배하면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요즘 배아복제니 장기이식이니 하면서 그 수명을 늘려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 생명나무에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인간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지배해야 할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우연찮게 오늘 예배의 부름에 해당하는 말씀이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으로 죄를 짓게 되었지만 결국엔 교만의 방식이 아닌 순종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잘 사용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간을 나 자신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결국 시간이 우리 신앙, 삶의 열쇠입니다.

 

다들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얼마 전부터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를 때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래 봤자이긴 합니다만 어쨌건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노래를 잘 못합니다. 심지어는 찬송가도 잘 못하는 편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찬송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참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음악 좀 한다는 친구들은 제가 음이 떨어지는 음치라느니 박자를 못 맞추는 박치라느니 합니다. 저도 그런 지적에 조금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찬송가를 최선을 다해 부르려고 애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노래방 때문입니다. 저는 노래를 잘 못 하기 때문에 노래방에 가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만 사무실에서나 모임에서 꼭 2차로 노래방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됩니다. 거기서 노래를 안 부르려고 해도 꼭 노래책 앞에 던져주면서 꼭 한 곳 불러야 한다고 강요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애창곡(18번 아닙니다)을 한 곡 불러야 합니다(I love You). 그런데 별로 잘 부르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막상 노래를 부를 때는 마치 내가 무슨 무대에 선 가수라도 되는 듯이 온갖 감정을 넣고 인상도 써가면서 군데군데 꺾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한 곡 만이 아니라 몇 곡 더 부르게 되지요. 또 가끔 운전하면서 노래를 틀어 놓는데 그때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또 가수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합니다. 공감하시는 분 계실 겁니다. 어떤 영화 보니 조인성씨가 땡벌을 신들린 듯이 부르더군요.

예배하면서 찬송 부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목사라는 사람이 찬송가 부를 때 노래방에서 가요 부르는 것만큼 열정과 정성을 들이는가? 가요는 온갖 감정 다 넣고 폼은 폼대로 잡으면서 가수처럼 부르려고 애쓰는데 찬송도 그렇게 정성을 다해 가사 한 줄 한 줄 깊이 음미하고 그 가사에 감정을 담아서 진지하고 거룩하게 부르는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이후부터는 찬송 부를 때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찬송만이 아니라 예배 전체에 마음을 담고 정성을 담고 몰입하게 되더군요.

사실 강단에서 여러분과 마주 하고 예배를 드릴 때 보면 제가 감동 받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윤성일 집사님이 찬송 부르시는걸 볼 때 그렇습니다. 집사님은 찬송 부를 때 항상 웃으면서 진지하게 부르셔요. 그 얼굴을 뵐 때면 저는 깜짝 놀라서 저도 폼잡고 인상 쓴 것을 풀고 웃으면서 찬송에 집중하게 됩니다. 또 강경숙 집사님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높여서 찬송할 때, 그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올 때도 깜짝 놀랍니다. 이런 경험들이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합니다. 이런 패턴으로 우리의 아침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진행됩니다. 굳이 무슨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자동으로 이런 패턴들이 우리 삶에 적용되지만 그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한 것이 나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된 것입니까, 아니면 몸은 나이지만 나라는 존재감이 없는 나였습니까?

우리의 일상은 나의 생각이나 나의 상상력, 나의 결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습니다. 그저 하던 대로 습관대로 패턴대로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저절로 익숙해진 패턴을 따라가기만 하면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오히려 하지 않던 일을 하거나 특별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매일 하던 패턴에서 벗어나버리면 문제가 발생하고 비난을 받게 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생각을 하거나 자기 자신이 결정하거나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일상적인 패턴을 따르고 그 일상에 순응하는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생각이나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더욱 선호합니다. 이 시대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 사회의 시간, 사스템의 시간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조차 자기의 시간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자신의 시간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시간을 우리 자신의 시간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결국 시간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시간의 문제이고 시간이 열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우리 자신의 시간으로 살지 못하고 그저 일상에 따라 기계적으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우리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도 한 구절 한 구절 정성을 다해 몰입하여 부르고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부르는 것, 설교말씀을 들을 때도 이런저런 번잡한 생각이 마음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말씀에 집중해서 듣는 것, 신앙고백문을 낭송할 때에도 우리의 진실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담아서 한 구절 한 구절 고백하는 것, 성찬식에 참여할 때에도 집례자의 손짓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새기면서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참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우들과 공동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또 진심 담아 이야기 해주고...

또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든지 간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고 진실하고 솔직하고 최선을 다해서 내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대하고자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감리교회식으로 말하면 성화되고 있는 것이며 성결하게 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거룩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며 : 베드로후서 38절은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이것이 시간을 소유하신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고 기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의식을 갖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분 일초를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던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열쇠입니다. 지성을 가진 우리가 시간을 바로 누리고 산다면 우리는 신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매 순간 순간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부터 몰입하십시오. 매 순간 몰입하고 빠져드십시오. 그런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7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21) 좋은만남 2013.07.24 94
196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28) 좋은만남 2013.07.30 105
195 그분이 맞아? / 요한복음 20:13-16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8.31 275
194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 좋은 교인 / 마가복음 6:7-13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8.31 241
» 결국 시간이 열쇠입니다 / 창세기 2:9,16-17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8.31 292
192 종교인과 생활인 / 누가복음 10:30-37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8.31 275
191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9/1) 좋은만남 2013.09.09 106
190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9/8) 좋은만남 2013.09.09 109
189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9/15) 좋은만남 2013.09.17 106
188 의무+감(感) / 고린도전서 3장 16-21절 - 남기평 전도사 좋은만남 2013.09.17 266
187 묵상기도 기도문입니다 좋은만남 2013.09.24 230
186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9/22) 좋은만남 2013.09.26 114
185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9/29) 좋은만남 2013.10.02 113
18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10/6) 좋은만남 2013.10.11 101
Board Pagination Prev 1 ...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