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7장 21-23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제목 : 지금쯤 다시 한 번 되돌아봅시다
설교일 : 2014년 2월 9일
[좋은만남교회 주현절후 제5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오늘도 이 귀한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신성하고 복된 자리에 나와 기쁨으로 예배하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좋은만남교회의 교우 여러분께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자비,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목회한 게 벌써 14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일 예배인도를 600번 가까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반주자가 없는 날이 그렇습니다. 무반주로 찬송을 불러야 하는 경우에 특히 긴장이 되고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지금은 짬밥수가 돼서 그런지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좀 색다른 경험을 합니다. 지난 주일인가요, 반주자 없이 예배를 시작했지요. 다행히 전도사님이 첫 음을 잘 잡아주셨고, 무반주로 입례송을 부르는데 그게 나름대로 또 깊은 영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감정이 몰입되더군요.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중에 반주자가 와서 반주를 하니 또 그게 거부감이 드는 게 아니라 뭔가 풍성하고 장중한 느낌이 들면서 또 흔한 말로 은혜롭더라구요. 14년만에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개신교회,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는 참 교파가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악기파, 무악기파 교단이 있다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악기파, 무악기파가 뭔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예배에 악기를 사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교파가 갈라진 경우가 있더라는 겁니다. 나름대로 주장하는 바의 일리가 있겠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악기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교파가 갈라지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자신의 신앙에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악기 반주가 있건 없건, 아기들이 예배시간에 울고 떠들건, 예배의 환경이 어떻건 모든 것에서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연 무엇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우리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쯤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하는 설교인데 무슨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제가 자주 강조하는 신앙의 요구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많이 들으신 내용이겠지만 잊어버릴 만한 지금쯤, 좋은만남교회 신앙고백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시다.
들어가서 : 1.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자
우선 하나님은 누구시길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이십니까? 저는 제가 믿는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각자의 고백과 관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인들의 고백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그냥 습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라고 부를 뿐 어떤 내적인 만남과 그 만남을 통한 고백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보다 다양한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 신, 아버지, 어머니, 주님, 진리 정의 생명 평화 등등 말입니다. 그 외에 어떤 또 다른 느낌과 이미지로 우리가 고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맞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이 진심을 담은 고백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허무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도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가르쳐주는 고백을 달달 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고 어떤 분이시며 어떤 관계인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2. 나(우리) 자신을 알자
신앙의 주체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 더 나아가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더 나아가면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규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가능하겠습니까? 내가 틀리면 관계도 틀려집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이 없다면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한 주체로서 바로 서지 못하게 됩니다. 이게 철학입니다. 하나님은 성서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복음적 삶의 방향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소크라테스가 말했지요. ‘너 자신을 알라!’ 철학이 없으면 신앙이 불가능하고 기복신앙, 샤머니즘, 이단·사이비로 전락하게 됩니다. 기복신앙이 뭡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 즉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니까 그저 달라고만 빕니다. 그게 기복신앙이죠, 샤머니즘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께 직접 다가가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무당, 영매를 통해서 신을 찾는 게 샤머니즘입니다. 이단·사이비가 뭡니까? 제 주제를 모르고 제가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이단·사이비입니다. 우리 신앙은 우리 자신을 바로 보고 참된 자아를 발견할 때 올바르게 된다는 것을 지금쯤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3. 올바르게 기도하자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내면을 통해 신과 나누는 교감, 대화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과 나누는 교감, 사랑하는 연인과 나누는 교감을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교감의 언어는 가장 내밀하고 진실하며 솔직한 언어이자 사랑이 담긴 언어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솔직히 이건 제가 잘못한 겁니다. 그 기도는 저 들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들으시라고 하는 건데 제가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목회적 교육이 필요하고 또 주일에배는 대표성을 갖고 하는 공공기도이니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행새 깨나 한다는 다른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 교인들에 비하면 우리 교우들의 기도는 참 아름답고 좋지만 여전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사랑이 아닌 공포가 담겨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단 어휘가 너무 형식적입니다. 교감의 언어가 아니라 한글개역성서의 옛 문어체입니다. 동시대와 맞지도 않고 뜻도 모르며 어색하기만 한 단어와 어휘들이 교회 안에서는 마치 신령한 언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또 기도할 때는 목소리까지 변하니, 보통 사람들이 볼 때 교회는 이상한 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에게 하는 말투가 전혀 아닌. 하옵시고, 마옵시고, 했사오니, 주시옵소서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야 입에 착착 붙으면서 기도가 감칠맛이 난다고 생각하고 또 은혜롭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제 옵소체는 음슴체와 더불어 인터넷에서 까부는 느낌으로나 사용하는 어투입니다. 이젠 정말 하나님과 교감을 나누는 언어로 기도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태도가 분명 달라질 것이고 하나님이 저 멀리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 계신 분으로 새롭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호칭도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이 인간 자신과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뒤섞여서 사용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아버지와 주님은 결코 뒤섞일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주와 종의 관계라고 한다면 주님이라고 부르세요,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다면 더 이상 주님이라고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고요.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권세를 얻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담아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공포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포는 뭔가 결핍과 부족, 불안을 느낄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되돌아보십시오. 무엇인가를 달라고, 도와달라고, 채워달라고, 지켜달라고, 이끌어 달라고 하는 말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어버이다, 그런데도 그 자녀들인 성도들은 공포의 언어로 기도한다? 이건 맞지 않고 우리 내면이 위선과 분열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포의 언어로 하는 기도는 미신적이기도 합니다. 미신은 말도 안 되고 종교적으로도 망령되다고 판단되는 신앙. 또는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으로 점복, 굿, 금기 따위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다 만사형통한다고 많이 가르쳐 왔죠?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핍에 의한 공포심을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금기를 잘 지키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미신과 다른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포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로 기도하려고 애쓰십시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저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4. 귀가 아니라 삶으로 말씀을 받자
말씀이 길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말씀을 받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요즘 제대로 된 교파의 강단에서 설교하려면 최소한 석사 이상의 학력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그저 성령 받았다면 데려다가 목사 안수 주고 설교 시키고 하는 시대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목사들 설교 내용이 어느 정도 평준화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화법이나 화술에서는 차이가 납니다만 그런 설교는 듣고 나면 예화와 농담만 기억에 남지요. 아니면 내가 동의하고 좋아하는 얘기만 기억에 남습니다. 내용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게다가 요즘 케이블TV나 IPTV 때문에 채널이 많아졌는데 기독교 방송도 많이 나옵니다. 어쩌다 틀어보면 수많은 목사들의 설교가 쏟아져 나옵니다. 네, 내용은 다 거기서 거깁니다. 특히 수요성서대학으로 한껏 높아진 우리교회 교우님들의 수준을 채우기에는 넉넉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 교회 좀 다녔다 하는 교인들은 설교 평론가 수준입니다. 실제로 좋은 설교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헤매는 교인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에 가서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던 모든 설교의 주제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 믿고 행복한 삶을 살자! 믿는 것과 행복한 것이 뭐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2-30분씩 목사가 목에 핏대 세워가며 강론하는 겁니다. 교인들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매주일 조금씩 바꿔가며 재탕 삼탕 하는 겁니다. 예화나 세부적인 것이야 분명히 다르지만 큰 틀 안에서는 같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죠?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교육적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선포가 뭡니까? 이게 하나님 뜻이다.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전하는 하나님 명령입니다. 설교는 듣고 이해하면 좋습니다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내야 설교를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말씀을 귀로만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몸으로, 삶으로 받으시려고 해야 합니다. 설교는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듣는 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는 게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설교 나쁜 설교 없습니다. 아무리 설교자가 거지 같이 설교해도 그 말씀을 들은 내가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면서 살면 좋은 설교가 됩니다. 이 시대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리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 설교해도 그 말씀 들은 사람이 그냥 그 자리에서만 고개 끄덕끄덕하고는 돌아서서 개떡 같이 살면 그 설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튼소리가 돼버립니다. 좋은 설교자를 만들어 주시는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며 : 방 목사가 맨날 하는 설교를 추려서 엑기스로 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꼭 기억하시고 때마다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자, 2. 나(우리) 자신을 알자, 3. 올바르게 기도하자, 4. 귀가 아니라 삶으로 말씀을 받자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