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8장 31-38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제목 :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설교일 : 2014년 3월 2일
[좋은만남교회 주현절후 마지막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우리가 미처 깨닫지도, 상상하지도 못하는 크고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기쁨과 감사로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목이 “사망 판정받은 美남성, 장례식 앞두고 '부활’”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신 분 계신가요? 기사내용은 미국 미시시피주 홈스카운티 검시소에서 78살 월터 윌리엄스라는 남성이 공식 사망 판정을 받고 장례식 준비를 하던 중 다시 살아나 사망선고를 철회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매장한 다음이 아니라 장례식 전에 되살아나 다행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나 자신이 예수라고 하고 신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도 이 남자의 부활이나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경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멈추었던 맥박이 다시 뛰는 물리적 생체적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이 바로 나에게, 우리에게,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도하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변화를 만들기 기대를 갖고 기도하며 그 부활을 맞이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언제부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셨을까?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바탕으로 쓴 성서가 복음서인데 이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검퓨터에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기록자는 1장 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밝히지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이 처음 나오는 부분은 오늘 읽은 말씀, 8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1장 25절, 13장 32절, 14장 36절, 이렇게 단 세 구절이 더 나옵니다. 마가복음이 16장에 불과하고 그 내용도 주로 예수님의 교훈이나 어록보다는 행하신 기적과 치유, 그리고 고난이 많다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너무 늦게 또 너무 적게 나옵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이 아주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만 일반적인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선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로마 황제의 통치를 비판하고 그에 대한 전복을 기도한 내란음모자였고 그에 따라 정치범에게나 내리는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선고에 동조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부르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수천 년 동안 지키고 전승해왔던 종교적 전통과 교리에 도전하는 이단이었기 때문에 가만 놔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였고 경악하였으며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고? 네가 신의 아들이라고? 이런 쳐 죽일 놈!’하면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를 보겠습니까? 둘 중 하나입니다. 정신병자 아니면 이단 사이비 중 하나이죠. 만약 신문기사에 나왔던 사망확정을 받았다가 장례식 직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자기가 사실은 재림예수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신기하기는 하지만 어쨌건 잠시 맥박이 멈춘 사이에 꿈을 꿨거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독생자 외아들이라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고백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당시 예수님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기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안상홍이나 문선명 같은 경우였지요. 그러니 정통적 교리를 지켜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밉고 죽여버리고 싶었겠습니까?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 기록 당시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가 돼서 좀 거리낌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차마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을 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중간쯤에 한 번 넣고 그 뒤에 겨우 세 번 정도만 더 넣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던 전통대로 하나님을 주님, 주인님, 마스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로 이해하고 가족처럼 마음에 모시어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다르게 그런 예수의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과대망상적 고백을 정통신앙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가 맞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네, 하나님, 신이 인간의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놀라운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신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뭐가 됐다고요? 신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것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순간, 우리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바로 숨겨진 비밀입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나도, 당신도, 여러분도 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고 하나님과 가족으로 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 주었으니 너도 너의 이웃의 가족이 되어 주어라’고 명령하십니다.
목회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제 목회의 가장 큰 도움과 격려, 위로는 가족에게서 왔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두 아들들이 항상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해주었으며 물심양면으로 제 목회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목회를 하다 보니 저를 지탱해준 가족이 육체적 혈연적인 가족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우리 교우들도 이미 저의 가족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과 저는 가족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스러운 것은 가족들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딸 엘리스 공주에게 네 살 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치사율이 높고 전염성이 강한 디프테리아였기 때문에 의사는 공주로부터 아들을 격리시켰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아들의 고통을 멀리서 지켜보는 공주에게 그 아이는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왜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나요? 내게 입을 맞춰줘요." 엘리스는 아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고 단숨에 아들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답니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몇 달 후 엘리스 공주와 아들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이게 가족의 사랑이지요.
사실 가족이야말로 모든 것을 허물 없이 터놓고 나누며 때론 무지 심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용납되는 것도 사랑이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끼리 하는 말이 심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를 꾸짖을 때는 상처가 되는 말도 많이 합니다. 똑같은 말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매우 화가 나서 폭발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가족 간에 나누는 말,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듣는 질책은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교우들 간에 이런 가족과 같은 사랑이 충만하다고 믿으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가족, 우리 교우들끼리만 가족이 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이웃에게도 가족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온 인류가 참다운 가족이 되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1985년 아프리카의 기아가 심각했을 때 세계의 유명 가수들이 모여서 노래를 만들고 함께 부릅니다. 그게 바로 ‘위 아 더 월드’였습니다. ‘위 아 더 월드’란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돼주지 않고 경쟁자나 밟고 넘어가야 할 대상으로 여길 때 이 세상은 지옥이 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종교인들은 종교적 정결을 위해 피해갔습니다만 사마리아사람은 그저 그 사람의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삼성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상영되자 삼성이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삼성의 한 부장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부장의 글은 딸아이와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늘 아빠 회사가 자랑스”러웠던 딸아이가 영화를 보고 “아빠 회사가 정말 그런 일을 했어?”라고 물었기에 오해를 풀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그 글을 끝까지 읽어보기도 전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당신 딸이라면 거기에서 일을 시켰겠어?’ 당장에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자기 딸, 자기 가족이라면 절대 그런 환경에서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이니까요.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삼성이 정말 자기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했다면 고 황유미씨 같이 허망하게 스러져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나왔겠습니까?
하나님, 신이 우리의 가족이 되어주셨고 허락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우리도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라는 깊은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가족이 되어 줄 때,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고자 노력할 때 이미 그 곳은 하나님 나라가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좋은만남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가족이 되어준 것처럼 이제부터는 교회 밖 세상 한 가운데서도 우리 이웃들의 가족이 되어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며 : 앞집 수탉은 새벽이 되면 홰를 치며 울어 주인의 잠을 깨우고, 뒷집에 진돗개는 집을 지키기 위해 짖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앞집 닭과 뒷집 개가 조용했습니다. 하루는 개가 닭에게 묻습니다. “닭아, 왜 새벽에 홰를 치지도 않고, 울지 않니?” 닭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야, 우리 집 주인아저씨가 직장을 잃고, 백수가 되었는데 새벽잠을 깨워서야 쓰겠냐?” 닭도 개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요즈음 짖지 않고 조용한 거냐? 개가 짖어야지.” 개도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야, 앞을 봐도 도둑, 뒤를 봐도 도둑, 세상천지가 도둑놈들 판인데, 누굴 보고 짖나? 짖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닭 같은 미물도 가족이 될 때 마음을 헤아립니다. 앞뒤를 봐도 온통 도둑놈 천지인 세상에서 우리가 이웃의 가족이 되는 삶을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말씀을 받고 깨달아 가족이 되어 주는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이끄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