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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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11:4-9

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제목 :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들어가며 : 조건 없는 깊고 넓으며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시고 또 기르시며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오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교회에 나와 그 이름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들이 동물원에 소풍을 왔습니다. 선생님은 사자우리 앞에서 아이들을 세워 놓고 물어봅니다. ".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은 무슨 동물이죠?" 그러자 아이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 "사자요!" 하고 일제히 소리질렀지요. 선생님은 박수를 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그렇다면 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이 모두 주춤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호랑이, , 코끼리???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맨 뒤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아저씨가 소리쳤습니다. "암 사자요~!“

저도 제 아내를 무척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제가 또 급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가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아내지만 그 앞에서 병든 어린 짐승같이 뒹구는 저를 살갑게 간호해주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무서운 아내만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평생을 같이 사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들어가서 : 아내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인간 간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 유추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나 좋은 스승, 혹은 배우자, 혹은 친구 같은 관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제가 아내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척 무섭지만 또한 나를 무지막지하게 사랑해주는 어떤 존재!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유효할 때만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이 식으면 언제라도 나를 집어삼킬 공포가 될 수 있는 그런 존재! 우리가 배워왔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는가, 우리가 구세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임무를 대행하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며 마음에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다 그 일의 목적이 있습니다. 무의식중에 하는 일이라 할 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고도화되고 패턴화되면서 그 일의 원래 목적이 잊혀지고 그 행위, 일 자체가 중요해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 멋진 연예인이 명품을 걸치고 나온 장면을 보면 그것이 어떤 목적에 필요한가를 따져보기도 전에 , 저건 꼭 사야해!’ 하는 마음을 먼저 먹게 되는 것이죠. 자본주의 상업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에게 강요된 탈목적화의 일면이기도 한데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닌지 걱정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왜 나왔는가 하는 것 역시 본래의 목적을 잃고 엉뚱한 것을 구하면서 나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왜 지금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까요?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 믿으면 복 받으니까, 행복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등등의 목적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교회 나오고 하나님 믿으면 모두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그럴까요?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만 봐도 목사라는 성직에 비해 소유한 부가 딱히 없지요. 원불교 신자라는 이건희 회장은 저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물질이라면 우리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도덕성 때문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진리라기보다는 교회라는 집단 자체를 위한 이익에 복무하는 논리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PD수첩, ‘목사님 돈을 어디에 쓰셨습니까?’편을 보셨는지요? 최근에는 자기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그걸 못 이겨 가출한 아내를 찾아가 아내를 목 졸라 죽인 혐의로 붙잡힌 목사도 있었다. 그 목사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한 탄원서까지 제출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과연 진리가 있을까, 저도 의문이 듭니다.

교회에 다니면 천국 가서 영생을 누린다는 말을 믿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굿닥터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어렸을 때 자기에게 간을 이식해주고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다가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진 한 소녀가, 하늘나라가 없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천국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착하고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이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지하철에서 한 노인이 소리 높여서 전도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시던가!!!’ 천국이 아무리 좋아도 과연 하루라도 더 빨리 죽어 천국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는 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말 그대로 그리고 실제로도 끝나지 않는 삶일 것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만 몇 날이 걸릴 지도 모르며, ‘다음엔 뭘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몇 주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끝까지 학교를 졸업하지 않을 것이며, 교수회의든 다른 모든 회의들도 몇 달씩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처럼 따분함에 몸서리치게 될 것이며 그 신들과 똑같은 장난에 세월을 보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영생, 죽은 뒤에 맞이하게 될 하늘나라라는 것도 관점에 따라 보면 도전이나 역경도 없는 참으로 지겨운 시간의 무한반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걸 위해서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까?

작은 아들 친구 중에 목사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놀러 가면 이 친구가 우리 혁이에게 설교를 한다나 성경말씀을 가르쳐 준다나 그렇답니다. 그래서 뭘 배우고 왔냐고 물었더니 하나님 믿고 따르고 순종하면 천국 간다는 것을 배웠답니다. 그래서 믿는게 뭐냐, 어디로 가는데 따라가냐, 순종하는게 뭐냐 물으니 모르겠답니다. 그렇죠. 초등학교 5학년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그냥 암기해라, 그리고 믿으라고 교회에서는 가르치죠.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겠습니다.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께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약속된 바로 그 분, 메시야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통 ’ ‘아니오입니다만 예수님은 대답으로 이사야서 611절의 은혜의 해에 관한 구절을 읽어주십니다. 이 쌩뚱 맞은 답변에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왜 광야로 나갔느냐?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그러면서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갈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갈대는 강가나 바닷가처럼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지, 광야같이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는 자라지 못하지요. 즉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식으로, 광야에 엉뚱한 것, 말도 안 되는 것, 허황된 기적을 바라고 나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묻고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부드러운 옷, 고급스러운 옷, 빛나는 옷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재물, 성공, 명예, 권력, 인기 등등 부귀영화를 상징합니다. 역시 부귀영화를 바라면서 광야로 나오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광야는 선지자, 예언자를 만나는 곳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세례요한이면서 또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광야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 오늘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말을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교회는 엉뚱한 기적이나 부귀영화를 구하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것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만나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하고 수많은 별칭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활동 당시에 붙여진 별명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 이후 2-3백 년이 지난 후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교리가 정교화 되고, 정통화 되고, 상징화 되면서 붙여진 교리적 별명입니다. 예수님 그 자신에 대한 별명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로 하는 예수님에 대한 별명이란 말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갈대이거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예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야 할 교리 이전의 예수은 누구이며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찾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4-6절의 말씀입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이 사람 되게, 억눌린 이들이 자유를 누리고 억압 받는 이들이 회복되고 가난한 이들이 돈보다 훨씬 좋은 복음을 받게 될 것이며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는데, 이런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반대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권리를 누리며 물질적인 것으로 비탄에 빠지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예수의 일, 예수의 길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목적이 다름 아니라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함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괜히 와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 생명을 위해 사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나름대로 목회를 잘 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돌아보면 부드러운 옷, 즉 부와 권력을 지향했고 갈대처럼 처탄하게 나조차도 알지 못하고 고백하지 않는 교리들을 반복해서 외웠으며 그것을 설교하고 설명하려고 애써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길은 알지만 예수의 길을 따라 걷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여겨야 한다고 설교하였지만 정작 나는 내 즐거움과 내 취미, 내 사상과 생각에 더 골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꼬박꼬박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왜 그 수많은 시간을 오가면서도 예수님 그분을 미처 보지 못했을까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직업이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나가며 : 첫 아이를 가져 출산을 앞둔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팠습니다. 남편은 황급히 아내를 차에 태워 산부인과에 갔습니다. 남편은 진찰실 밖에서 아기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진찰실에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배탈입니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것을 기다리다가 엉뚱한 것을 만나는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길을 따르며 그처럼 살 것을 결단하기 위함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오늘 예수님 만나 예수님처럼 살아가시게 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격려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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