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15장 1~6절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제목 : 뼈다귀해장국이냐, 감자탕이냐?
설교일 : 2014년 12월 7일
[좋은만남교회 강림절 제2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온누리 하나님 나라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좋은만남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부흥집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도중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성도들이 머뭇거리자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길, “그곳은 ‘사랑해’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항상 따뜻한 바다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길 원합니다.” 그러자 평소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느 여집사님께서 집회가 끝나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면서 목사님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문제를 한번 낼께 맞추어 봐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예요~~. 그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남편이 머뭇거리며 답을 못하자 온갖 애교섞인 소리로 힌트를 주면서 말을 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 그러자 남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자신 있게 하는 말... "열~~바다!!“
연일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추운 날씨일수록 따뜻한 말, 사랑해! 서로 해주면서 따뜻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말씀하세요. “사랑합니다.”
들어가서 : 매 주일 설교를 하다보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월 한 번씩 하게 되니까 설교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나 합니다. 무슨 소재로 무슨 주제의 설교를 할까 고민하면서 지금은 교인들에게 더 이상 교리설교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구원의 교리 같은 것은 대속론이라고 하는데, 어느 누군가의 죗값을 남이 대신 갚아 준다는 의미인데, 이게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별로 큰 의미가 없어요. 설화로 보면 흥부가 형 놀부의 곤장을 대신 맞아주고 쌀을 얻어 온다거나 마을을 괴롭히는 괴물이나 자연현상에게 누군가를 대표로 뽑아 제물로 바친다는 정도, 일제 강점기에 감옥에 갈 형제 대신에 옥살이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이다 보니 대신속죄라는 구원론 같은 것은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오히려 약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억압에 대한 한풀이로서의 구원론이라면 더 마음이 움직이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풀이 해주시러 오신 예수님! 좀 어색하긴 합니다.
또 원죄론 같은 것도 그렇지요,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데, 요즘 정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고위급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아주 버젓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봐야하는 현실에서 과연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원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그게 죽을 죄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의 임무가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리 같은 것들에 대해서 멋들어지게 설교를 해서 관심을 돌리고 설득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바뀐 시대상에 신앙의 핵심을 잃지 않고 삶의 가치관을 세우도록 돕는 것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보모와 자식의 인격적인 관계이지 사영리 같은 교리를 달달 외우고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입씨름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모 자식 같은 인격적인 관계라고 믿으시지요?
기관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말씀 전하는 것이 전 같지 않습니다. 성서연구 시간과 성서독서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보니 설교를 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다 제가 제일 연급이 높은 목사이니 부담감이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보다는 제목이나 영상 뭐 이런 것에 집착하게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 설교가 바로 그렇습니다. ‘뼈다귀해장국이냐, 감자탕이냐?’ 이 제목을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피식 웃으면서 ‘감자탕이나 뼈다귀해장국이나 뭐가 달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감자가 있냐 없냐의 차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뼈다귀해장국은 혼자 먹는 것이고 감자탕은 2인분 이상 같이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 개 중에 어떤 것이 더 땡기십니까? 혼자 먹는 것이 땡기십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 같이 먹는 것이 땡기십니까? 오늘 설교제목은 적절하지 않고 단지 자극적으로 잡은 것임을 인정하면서, 제가 오늘 여러분께 도전을 드리고 싶은 주제는 여러분의 삶이 개인주의의 삶에 길들여졌는지, 아니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줘야 할 삶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공동체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강조하는 문화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로 이행하면서 우리의 가족은 해체되었고 함께 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것이 더 편안한 것이 돼버렸습니다. 가족과 함께, 친구나 지인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혼자인 사람들을 위한 물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주의보다 공동체문화 혹은 집단주의가 더 낫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북한 인도지원사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북한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사회가 월등하다거나 건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7-80년대에는 전체주의나 사회주의 못지않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저녁 6시가 되면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벌떡 일어서 가슴에 손을 얹었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은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기본적으로 배경에 깔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이고 상업주의, 맘모니즘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개인이 강조되면서 개성이 부각됩니다. 그러다보니 차별화라는 것이 미덕이 됩니다. 전에는 한 집에 한 대의 텔레비전이 있으면 됐습니다만 개성이 강조되고 개인화를 부각시키는 사회가 되면서 식구들은 다 자기 방을 가져야 하고 한 방에 한 대씩 텔레비전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는 프로그램을 나는 보기 싫다, 어머니도 텔레비전이 필요하고 딸도 필요합니다. 개인이 강조되고 사회가 개인주의화되면 될수록 팔아먹을 물건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사람은 많아지는 것입니다. 소비가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보급이 되고 나니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는 것이 부의 상징이 되었고 그것을 갖고자 하는 노력은 경쟁으로 나타났습니다. 공동으로 즐기던 문화가 개인적인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음악콘서트를 콘서트장에 가서 듣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공간에서 최고급 음향기기를 통해서 혼자 즐기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게 된 것이고요.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조직적으로 유포된 것은 단지 기술의 발달이나 개인존재의 발견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산 판매된 물품은 언젠가는 폐기됩니다. 더 많은 생산은 더 많은 폐기물을 만들겠지요. 인간이 자기만 생각하면서 생태환경은 더 이상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나만 잘 되면 되고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편리하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생태환경이 파괴되는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됩니다. 결국 개인을 유난히 강조하는 풍조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환경을 단절시키고 인간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지난주에 방영된 드라마 미생에서 그런 인간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개인주의는 결국 인간 간의 유대를 끊게 하여 외롭게 만들어 놓고 부자들과 기업주들만 배불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니면 물질과 자본, 돈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구절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나오는 사진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깜깜한 밤, 하늘에 가득한 별들과 달, 주위에 하늘거리는 풀들과 나무들, 그 새에 숨어 있는 풀벌레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밤새들이 울었을 것이고 먹이를 찾아 나왔던 짐승들이 무슨 일인가 경계하면서 아브라함을 지켜보았겠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미 그 순간이 하나님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복은 아브라함과 수많은 별들이 서로 의지하듯이 빛나는 것처럼 모든 별들과 짐승, 벌레, 풀들과 나무들이 거대한 한 틀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그런 세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굳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복을 약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진정 복 받은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한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나가며 : 저는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는 하나님과 맘몬, 바알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과 돈, 물질, 자본을 상징하는 맘몬과의 기나긴 싸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성서를 읽는 성도들이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결단하라는 요청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체와 공동체에 매몰돼 있던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소중함에 주의를 환기하게 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은총의 단계를 넘어 탐욕과 욕심의 도구가 될 때 은혜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하게 개인화되고 이기적이지 않은 것이 사랑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만 매몰돼 있을 때 하나님과 대적하는 맘몬, 바알은 힘을 얻고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될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세계를 떨치고 나와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인 관심을 갖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라는 잊혀진 문법을 복원해야 할 때입니다. 그 문법이 회복되는 때에 우리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역사를 공동체적 삶의 역사로 바꾸어 맘몬에 대항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를 확신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