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5장 17~20절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제목 : 율법의 완성, 신앙의 과정
들어가며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복된 주일에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며 세우신 이 교회에 나와 찬미하고 교제하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을 베푸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살기가 너무 힘들다, 나라가 나라 같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제 주위에 그런 성향의 사람들만 있어서 그럴까요?
외과의사 4명이 카페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의사가 수술하기 쉬운 사람에 대해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도서관 직원들이 가장 쉬운 것 같아. 그 사람들 뱃속의장기는 가나다순으로 정열되어 있거든….” 그러자 두 번째 의사가 말했습니다. “난 회계사가 제일 쉬운 것 같아. 그 사람들 내장은 전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거든 ….” 세 번째 의사도 칵테일을 한잔 쭉 마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전기 기술자가 제일 쉽더라. 그 사람들 혈관은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잖아….” 세 의사의 얘기를 듣고 있던 네 번째 의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난 정치인들이 제일 쉽더라고…. 그 사람들은 골이 비어 있고,뼈대도 없고, 쓸개도 없고…. 소갈머리, 배알머리도 없고, 심지어 안면도 없잖아. 속을 화~~악 뒤집어 헤쳐 놓으면 ‘돈’만 나와 ~~.” 제가 이 유머를 스크랩해 놓은 게 2006년입니다. 지금 이 유머를 해도 통한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실천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 만약 이 외과의사들이 우리를 수술한다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우리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려면 우리 안에는 사랑과 자비, 진리와 정의가 가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두 그런 성도가 돼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서 : 종교개혁주일은 10월이라 좀 뜬금 없는 이야기 같긴 하지만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만약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가톨릭 신자였을 겁니다. 종교개혁은 지금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500년 전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와 불신과 무능에 반대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개신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요즘 한국의 개신교회가 가는 방향을 보면 이제 개신교도 그 수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진지하게 되물으며 우리가 어떤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인지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3대 원리는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총으로만!(Sola fidei, sola scriptura, sola gratia!) 입니다. 가톨릭은 교황과 역사를 상징하는 전통과 각종 성사를 의미하는 예전(전례)도 중요한 원리로 보지만 개신교는 가톨릭의 전통과 전례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이 세 가지만을 기본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은총의 근거는 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가장 주요하고 기본적인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발견하고 또 은총을 깨달으며 비로소 믿음의 눈을 뜨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봐야 하겠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다는 사실을 믿습니다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과학시험을 볼 때는 진화론에 따른 답을 선택해주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가끔 왜 성서에는 공룡이 나오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성서의 역사는 고작 몇 천 년으로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잡지만 과학은 지구의 역사를 수십억 년으로 추측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학의 이론 대신에 창조의 이론이 맞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기독교인 그룹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과학만이 아니지요. 중세시대 이후 세계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천지개벽을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긍정적인 자각이 나타났고 엄청난 기술의 혁신을 시작하였습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전 지구적 이동이 가능해졌고 왕에게만 있던 주권은 점차 백성에게로 이양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그 창조와 발명의 주체자인 인간 자신이 그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었고 21세기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연 성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시대에 성서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솔직히 많은 학자들과 설교자들은 당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성서의 구절 하나하나를 기독교인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조문 같이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법조문, 성서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율법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대로 ‘일점 일획’도 허투루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말 그대로 율법,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서는 오늘날 우리 신앙에 웃지 못할 해프닝을 만들어 냅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습니다. 여호와증인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잘 모르던 시절이니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들였는데 다짜고짜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편 82,1의 ‘하나님의 회’라는 단어를 들이대며 이사들이 모여서 이사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많아서 하나님들이 모여 하는 회의가 하나님의 회라는 겁니다. 깜빡 넘어가서 나중에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새번역에는 다행히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번역이 되었더군요. 그럼에도 ‘신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론을 상정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또다시 생기게 됩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그것은 성서가 쓰여지고 번역된 그 시대의 가치와 생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기의 상황이 다른데 그냥 그대로 문자대로 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서를 율법과 같이 이해하면서 그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봅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율법, 종교적 규율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종교인들일까요? 제 생각에는 이슬람교인들이나 안식일교, 여호와증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교야말로 정말 코란의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 모조리 때려죽이고 여자들 억압하고 타종교를 부정합니다. 안식일교 사람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매매행위도 하지 않고 정말 유대인들 안식일 지키는 것처럼 철저하고, 여호와증인은 무기를 손에 대지 않겠다고 기꺼이 병역 대신 감옥행을 택합니다. 자기들 경전에 있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 이를 악 뭅니다. 그에 비하면 개신교 교인들은 빡빡하게 율법 지킨다 해도 여기엔 명함도 못 내밀지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서에 따라 여성을 억압하고 타종교를 무자비하게 살륙하는 이슬람이나, 무기를 거부한다고 군대 대신 감옥에 가는 여호와증인이나,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우리가 존경하거나 칭찬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딱하게 생각하고 너무 문자적으로만 매여 있다고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너무 과한 선택을 놓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런 문자적인 성서이해는 그저 맹목일 뿐이고 발전이 아니라 퇴보이며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집착과 편집의 정신병 증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소위 신실하다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따라 살아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성서를 율법화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율법, 특히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구약시대에 형성된 것들이고 그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던 조항들을 담고 있습니다. 법은 만들수록 구멍이 생겨나지요. 법의 완성은 법조항을 많이 만드는 것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법을 들 수 있습니다. 2014년 8월 기준으로 전체 임금노동자 1877만 6천 명 중에 비정규직은 607만 7천 명으로 32.4%에 이릅니다. 비정규직법은 원래 비정규직을 무제한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구멍이 있었습니다.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법제화한 것이지만 기업주들은 2년이 되기 전에 아예 해고해버렸습니다. 원래 무제한적 비정규직 채용을 금지하려는 것이 원래 의도였으나 실제로는 악용되고 있습니다. 이게 법이고 이게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요즘 김영란법이 말이 많은데 뇌물수수를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법으로 만들면서 정치인을 넣느냐, 국회의원을 포함하느냐, 언론인도 넣느냐의 문제로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뇌물수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취지이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하는 대상들을 규정하자는 취지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게 법의 현실이자 한계이며 바리새인들의 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법 조항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이루려는 바, 그 법의 목적과 취지를 이룰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법의 완성은 그 취지가 지켜지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법은 하나님 나라,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목표이자 완성입니다. 율법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법조항을 지켰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정신을 구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성서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법의 취지와 정신,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방향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지 유대교가 바라보듯이 한 구절 한 구절을 달달 외면서 벌벌 떨며 지켜야 하는 그런 율법, 모세오경, 뭐 이런 목적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조항 하나하나에 목을 매는 그런 의보다 나은, 그런 의를 뛰어 넘는 의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법조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 실패하였고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율법이라는 지옥에 가둬 놓았습니다. 율법을 비판하고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벌여놓은 일입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가며 : 한 부대의 연병장에서 장교가 신병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소총의 개머리판은 호두나무를 쓴다, 그 이유가 무엇인줄 아는가?’ 신병들은 각각 저항력이 더 크고, 유연성이 더 크고, 더 반들반들 광택이 잘 나고, 더 단단하고 등등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장교는 ‘다 틀렸다. 호두나무를 쓰는 이유는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세세한 조목들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시대상과 생활상에서 어떤 원칙들과 어떤 기준들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원초적인 복음은 생명, 평화, 평등, 자유, 진리라는 가치이지,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위한 교리(원죄, 타락, 구원, 교회, 속죄, 대속...)가 아닙니다. 그런 교리들은 단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자 하는 복된 소식을 종교적인 언어로 해석해놓은 것이지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이런 가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원복음과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이런 교리들을 신봉한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처럼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신앙의 과정, 신앙인이 나아가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예언자의 말은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품고 완성하고자 실천하는 것은 신앙인이 반드시 받들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완성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혹은 시대적 상황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각종 규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원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헌신과 노력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율법의 원 취지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마음에 품고 신앙을 이루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