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3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명화이야기

 

성서이야기를 예술신학적 관점에서 살피면 하나님의 창조는 예술적 창작이다. 하나님은 예술가로서 세상을 창조한다. 그는 자신의 창작행동의 결과물을 두고 좋다혹은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모습과 형상에 따라 지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화상이다. 에베소서 2:10은 하나님의 자화상으로서 인간을 하나님이 지은 시(포이에마 혹은 작품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라고도 읊는데, 는 자신의 창조주를 닮아 창조를 통한 아름다움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에베소서 2:10

10.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이 된 하나님이다. 하여 성육신한 예수는 예술가인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창조의 구극이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를 그림은 최고의 작품이 된 하나님을 그리는 일이며,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종교적 시각예술 본연의 임무 수행의 절정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직접 그리기를 꺼리는 프로테스탄트 예술가들에게 예수를 그림은 하나님을 그리고픈 저마다의 꿈을 이루는 몇안되는 길이기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카톨릭 화가처럼 대범하게 하나님을 직접 그린 일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그리고픈 이 화가의 예술적 욕망은 수많은 예수 그림을 통해 충분히 해소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피난 가는 하나님의 가족

성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당시 그레코-로만 세계의 신화와 비슷하고도 다르다. 신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당시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신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이 된 하나님이라는 성육신 신앙은 인간인 척하는, 제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신적 조재의 본질을 버리지 않는, 그래서 독수리에게 가늘 파 먹히는 신세라도 결코 죽지 안는 신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예수는 평범한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다.

마태복음서는 예수가 태어날 때 헤롯 대왕이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서 대량 유아 학살을 일으켰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예수는 헤라클레스처럼 자신의 적대자를 압도적 힘으로 물리치지 못한다. 그는 여느 어린아이와 같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다. 이에 예수의 부모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아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이집트로 피난을 간다.

 

지오토 <이집트로 피신하다>

 

예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가는 장면은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주제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연 화가 지오토의 그림은 그 가운데서도 유명하다. 14세기 프레스코 작품이다.

마리아는 화면의 정중앙을 차지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와 위엄을 유지하는 옷을 입은 마리아는 다정스러운 어머니와 달리 아기와 살갑게 눈을 맞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을 주시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품 안에 있는 아기 예수 역시 마리아에게 안겨 있기는 하지만 엄마에게 착 기대기보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의 가족 중 요셉은 직접 나귀를 끌지 않지만 마리아나 아기 예수와 비교했을 때 다소 가볍게 처리된다. 머리에 후광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그저 길잡이로 간주했을 것이다. 밝은 낮에 천사의 인도에 따라 시중드는 사람과 함께 길 떠나는 이 광경에서 우리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사지로 떠나는 긴박함을 찾을 수 없다. 그림의 배후 이야기를 알고 난 뒤에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이동은 피난혹은 피신보다는 호위를 받으며 어리론가 행차한다고 묘사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렘브란트 <이집트로 피신하다>

야심찬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작품은 독특한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그서은 바로 아기 예수 가족의 이집트행을 정말 앞날 모르고 길을 급히 나선 피난민 가정의 도피로 그린다는 것이다.

그림의 짙은 어둠은 그들이 맞은 상황을 상징한다. 주위는 캄캄하다. 나귀를 끌며 앞장선 남자는 남루한 옷에 신발도 신지 못한다. 이는 신발을 신지 못했을 정도로 남자의 상황이 다급했거나, 아니면 남자가 가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낮은 신분 때문에 신발을 신지 못할 처지에 있음을 암시한다. 여행 필수품이 다 들어 있지도 않은 듯 메고 있는 가방은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인과 아기의 안부를 살피고 있다. 한편 나귀 위에 올라탄 여인도 귀부인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과 아기를 감싸는 천은 전혀 고급스럽지 않다. 머리에 두른 두건은 빛을 받아 빛나지만 그 자체가 화려한 것은 아니다. 아기의 머리에는 후광이 있다. 그러나 여인에게 안긴 아기는 자신을 안은 여인을 바라보며 의지한다. 이미 많이 그리고 걸은 듯 나귀는 얼마 메고 있지 않은 초라한 짐에도 지쳐있다.

지오토가 그린 성 가족의 위풍당당함, 그래서 굳이 서로를 의지하거나 돌아볼 필요가 없는 성 가족과 렘브란트의 성가족은 현저히 대비된다. 렘브란트의 성 가족이 기댈 고은 서로밖에 없다. 여인은 남자를, 아이는 여인을 바라본다. 남자는 여인과 아이를 걱정한다. 다행히 한 빛이 그들의 길을 밝혀주나, 그 빛은 단지 한 걸음 앞만을 밝혀줄 뿐이다. 그 한 걸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채, 의지 할 대사이라고 해야 기껏 서로밖에 없으며, 초라한 짐과 행색을 한 그들은 정말 피난 가정이다.

 

렘블란트 <이집트로 피난가는 성 가족>

1653년 에칭으로 제작된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도 렘브란트의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행 중인 한 가족은 매우 지쳐 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 그 길은 내리막이다. 이 광경은 폭정을 피해 살 길을 찾아 나선 난민 모습, 바로 그것이다. 다른 난민 가정처럼 그들이 피해 도망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고독하고 위태로운 그 길은 내리막의 삶을 상징한다. 에칭황에서 아기는 다른 이들이 찾을 수 없을 만큼 엄마 품에 꼭 숨어 있다. 나아가 우리는 등장인물의 비범함을 증거해주는 후광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1627년 이후 렘브란트가 성 가족 그림에서 후광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후광의 제거는 더 이상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렘브란트는 어디서 성 가족의 이런 현실적인 도피의 모습을 그려낼 영감과 용기를 얻게 되었을까? 성서에 나온 예수의 말과 렘브란트가 살던 시대상이 그 출저라고 답변할 수 있다. 살 곳을 찾아 피난을 가는 성 가족의 모습은 동시대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가 종종 그렸던 구걸하던 부랑 가족의 유랑 모습과 유사하다. 렘브란트 당시 네덜란트는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양극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땅을 잃고 구걸하며 부랑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가족들이 적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그 모습을 여러 차례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는 길에서 곧잘 부딪히는 부랑가족에게서 성 가족의 이집트 피난 장면을 읽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 가운데, 곧 작은 자들 가운데서도 지극 작은(엘라키히스토스. 작은의 최상급), 그들 주에서 단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서가 제아무리 예수 가족을 난민 가족으로 묘사하고, 온전하게 인간이 되어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예수를 강조하며, 렘브란트가 이를 적실하게 포착했다 해도 결국 예수만, 그 성 가족만 기적적으로 구원받았음을 지적한다. 베들레헴과 주변의 아기들이 대량 학살 당하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통곡하는 자리에 마리아나 요셉은 없었다고도 꼬집는다. 아기 예수와 그들의 가족만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이집트로 피했으며 아기의 목숨이 안전해졌다는 계시를 받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다. 죽임을 당할 때 혼자만 기적적으로 산 사람을 어떻게 지극히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까? 죽임을 당한 지극히 작은 자들을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아기 예수를 자신들 중 하나로 인정해줄까?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예수

피터 폴 루벤스, <십자가로 올리다>, <십자가에서 내리다>, 제단화 _ 안트베르펜 성당

 

렌브란트 당시 대표작은 단연코 루벤스의 십자가로 올리다. 십자가에서 내리다. 루벤스는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 내세운 이념에 걸 맞은 화풍을 지녔다. 그의 그림에는 모호한 암시나 알 듯 모를 듯한 인물이 없다. 성서화는 문맹자의 성서라는 가톨릭의 성서화 이념을 구현한 결과이다. 또한 반종교개혁 미술은 예전 먼 곳에서 일어난 성서의 이야기를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느끼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루벤스는 이를 달성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반종교개혁의 종교화는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여, 신자들의 의심을 제거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및 교회와 고양된 교제를 유지하도록 기획되었다.

 

먼저 화면 정중아에 있는 예수의 몸을 살펴보자. 루벤스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릴 때의 근육질의 예수와는 다르게 그렸다. 그러나 루벤스의 죽은 예수는 여전히 모종의 위엄을 잃지 않는다. 예수의 몸은 밝은 빛을 받고, ‘시체에서 반사되는 빛이 도리어 살아 있는 주변 인물들을 비춘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이들도 죽은 예수를 극히 위엄 있는 분으로 존중한다. 죽은 예수는 흰 천을 이용해서 내리게 되는데, 십자가 오른편 위에 있는 한 사람은 그 천을 입으로 물고 오른팔을 펴서 예수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는다. 발 밑에 한 여인(막달라 마리아)은 예수의 왼발을 자신의 어깨에 두고 두손으로 예수의 발을 모시고 있다. 자신의 어깨에 예수의 을 갖다 댄 그 여인은 예수의 발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은 한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왼편 푸른빛 옷을 입은 이는 마리아이다. 마리아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하지만 절망의 몸짓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이는 마리아가 이미 예수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는 중세의 믿음을 반영한다. 이 그림에서 예수를 제외하고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오른편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흔히 사도 요한이라고 오해되는 애제자이다. 이 그림에서 예수를 품에 안으려는 이는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애제자인데, 이 자세는 일종의 피에타(라오콘, 도물 제사를 연상)를 보이기도 한다. 죽은 예수의 몸을 받드는 태도는 그를 이후 모든 제자의 모범으로 만든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적신 듯 애제자의 붉은 제자의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며, 이로 인해 애제자는 예수의 피로 옷 입은 처음 인물 중 하나로도 비친다. 그림에서 예수의 피를 받은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어깨로 예수의 발을 받친 여인이다.

루벤스 그림의 등장인물이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의 몸에 직접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가톨릭의 성만찬 해석이 이 그림에 반영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주장했다.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신자들은 예수를 직접 체험한다. 예수의 몸에 손을 대는 인물들은 예수와 몸으로 교감하는 가톨릭 신앙을 상징한다. 이 작품으로 루벤스는 그림의 신라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생겼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십자가에서 내리다에서 자신의 신앙 이해와 예술적 이념을 루벤스의 것과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스스로를 대가와 견주었다.

예수의 몸에는 균형 잡힌 근육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것은 그저 볼품 없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의 어둠과 달리 예수를 내리려 감싼 천과 예수의 몸은 밝게 지나지 않는다. 주변의 어둠과 달리 예수를 내리려 감싼 천과 예수의 몸은 밝게 처리되었지만 빛난다고 말할 수 없다. 루벤스의 고결한 흰 빛깔의 천과는 달리 렘브란트가 그린 천은 그저 흰 천일 뿐이다.

비록 몇 명이 예수의 몸에 손을 대고 있긴 하지만 루벤스의 인물과 비교할 때 예수의 시체와 사람들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현대의 x선으로 촬영한 겨리과 렘브란트는 애당초 마리아가 예수의 몸에 대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후 렘브란트는 마리아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그렸다. 이를 통해 렘브란트가 예수의 시체와 그 주변 사람들의 거리를 매우 의도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거리를 통해 렘브란트가 의도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화체설을 비판한 프로테스탄트의 성만찬 이해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재설, 공재설, 상징설을 받아들이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의 살과 피가 현실의 빵과 포도주로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만찬인 구원은 예수의 몸을 직접 받아들이는 데에 있지 않다.

한편 미술적 측면에서 감상자들에게 예수와 인물들 사이가 만들어내는 거리는 예수의 죽음을 더욱 쓸쓸하고 현실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렘브란트의 성서화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래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을 포착하고, 그 하나님을 보도록한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수요성서대학 -명화이야기 네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4.17 390
86 |無明園_성서읽기_마가복음 4장| saintheavy 2014.04.28 234
85 수요성서대학 -생활풍습이야기 다섯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01 385
84 수요성서대학 -명화이야기 다섯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01 401
83 수요성서대학 -절기이야기 첫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20 462
82 수요성서대학 -절기이야기 두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20 469
81 수요성서대학 -성전이야기 첫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30 427
80 수요성서대학 -성전이야기 두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5.30 398
79 수요성서대학 -동물이야기 첫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6.13 396
78 수요성서대학 -동물이야기 두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6.24 377
77 수요성서대학 _ 인물이야기 세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09.11 311
76 수요성서대학 - 광야이야기 다섯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10.02 322
75 수요성서대학 - 광야이야기 여섯 번째 / 남기평 좋은만남 2014.10.23 401
74 수요성서대학-식물이야기_다섯 번째 좋은만남 2014.10.23 484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