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축복?, 불의한 부(富)?, 요셉
요셉(יוׂסֵף)이란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 ‘יָסַף’(야사프), ‘더하다’의 미래형으로 ‘더할 것이다’입니다. 이름의 유래가 좀 재미있는데,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아들을 더 갖기를 원해 요셉 곧 ‘더할 것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습니다.(창세기 30:24) 어머니들의 욕심이란….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며, 라헬의 첫 아들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 드라마입니다. 어릴 적 그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형들과 아버지가 절을 한다는 꿈을 꾸었고 이를 들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 후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중 성실함을 인정받아 보디발의 재산을 관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전,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합니다.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였으나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는군요. 하지만 그는 형들의 말처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 꿈의 의미를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능력으로 감옥에서 시종의 꿈을, 이후 이집트의 지혜자들도 풀지 못하던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파라오는 ‘살찐 암소 7마리가 마르고 흉한 암소 7마리에 의해 먹히는’ 꿈, ‘잘 여문 이삭 7개를 바싹 마른 이삭 7개가 삼키는’ 꿈을 꿉니다. 요셉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7년 동안의 풍년이 후 7년의 흉년이 오게 될 것이다.(창세기 41장 29-31절) 결국 파라오는 그를 총리로 임명하여 이집트가 닥칠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 기근으로 인해 가족과의 상봉, 이집트로의 이주 사건이 펼쳐지게 됩니다.
자코포 아미고니(Jacopo Amigoni, 1682~1752)는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한니발〉과 같은 역사화, 종교화 및 귀족들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은 〈파라오 궁전의 요셉〉으로 요셉이 총리로 임명 받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그림 〈파라오 궁전의 요셉〉, 1750,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그림의 왼쪽부터 보겠습니다. 두 어린이가 준비하고 있는 빨간 쿠션은 요셉이 걷게 될 귀한 길을 나타냅니다. 총리 임명식, 파라오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를 요셉에게 끼워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넘기는 권한과 책임을 겸손한 모습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두 하인의 모습이 있네요.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은 동방풍의 머리쓰개를 주고 있고 그 뒤의 다른 하인은 권력을 상징하는 망토를 들고 있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향을 피우는 화로가 놓여 있습니다. 수여식의 거룩함을 말하는 듯합니다.
자코포 아미고니는 웅장하고 장엄한 역사적 사실처럼 요셉의 총리 임명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집중하고 있는 요셉에 대한 이해를 반영합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어려움을 당할 것이며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신의 꿈을 꾼다면 그에게 품은 신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요셉은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에 있어 전형적인 인물의 하나입니다.
아뿔싸. 요셉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다른 이야기가 있군요. 바로 노예 제도입니다.
20 요셉은 이집트에 있는 밭을 모두 사서, 바로의 것이 되게 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기근이 너무 심하므로, 견딜 수 없어서, 하나같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밭을 요셉에게 팔았다. 그래서 그 땅은 바로의 것이 되었다.
21 요셉은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
창세기 47: 20~21
자영농이었던 이집트의 백성들, 기근에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던 백성들의 땅을 헐값에 구입해 그들을 강제 노동에 빠지게 하는 주역에 요셉이 서게 된다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사실 신이 부여한 능력으로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통해 알게 된 지혜는 자영농의 시스템을 무너지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이들을 강제 노동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되는 지혜였습니다. 신에게 파라오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총리로 그렇게 했고 노예 제도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총리가 된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어두운 면을 보게 하고 있군요. 그에게 이제 다가올 동족의 노예 삶을 예견하라하는 것은 무리일까요?
부(富)의 축적 곧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은 개신교의 윤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직업소명설 곧 직업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이를 통해 부를 쌓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개신교의 윤리는 자본주의 발달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가온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의 한 모습을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가 지적하는군요.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1971~ ) 『21세기 자본』에서 소득의 불평등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많은 자료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가 해야 하는 부의 재분배가 자유시장 속에서 무너져 왔으며, 비민주적인 몇몇에 의해 부가 독점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부와 부의 축적은 건전한 노동이 아니라 세습된 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림 높은 자본수익률과 부의 불평등
『21세기 자본』의 서장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로 시작합니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불의한 부에 대해 요셉에게 묻는 것은 어떨까요? 라헬에게 아들의 이름을 ‘더할 것이다’라고 한 것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라헬과 요셉의 축복에 대해 집중하는 동안, 개신교의 윤리가 만들어낸 부를 쌓고자 생각하는 동안 우리가 물어야 하는 신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여전히 요셉을 바라는 마음,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 앞에 한 번쯤 생각해야 할 부(富)에 관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