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17-22
17 ○다음에 지시하려는 문제에서는, 내가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18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서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밝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당파도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성찬"
개신교회가 공식적으로 행하는 성스럽고 거룩한 예식은 세례와 성만찬입니다(가톨릭교회에선 여기에 견신성례, 고해성사 등 몇 가지가 더 포함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특히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성찬을 받는 사람이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으로 인정할 때에라야 그 행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을 막고 마시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그것은 성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쓸데 없는 짓에 지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까지도 말합니다.
종교행위라는 것은 고도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작용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라는 그릇에 담아 표현하면서 신비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게 필요합니다. 성찬이 말 그대로 '거룩한 만찬'이 되려면 겸손하게 주님의 나타나심을 간구하는 우리의 자세와 믿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