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계시가 요나에게 내려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The word)이 요나에게 임하지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2절과 같이 받아드리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2절 전반부에 “큰 성읍”을 주목해야 합니다. NIV에서는 “the great city”라고 표현하는데, 웬만한 대도시보다 크고, 그 당시 도시발전의 최정점에 있는 도시, 니느웨입니다. 오늘날의 대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조금 비약하고 과장되어 말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효율과 실리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사람의 가치가 범주화됨은 물론, 여러 숫자라는 표기로, 단순히 환원되게 됩니다. 인간이 편리하게 방법으로 차용했던, 돈, 법, 그리고 기타 매개수단들이 어느 순간 역전되어, 이에 종속되어서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인간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그곳에, 인간이 지금의 생활방식과 행태들이 잘 못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에 임무를 받은 이가,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방식은 잘못된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이롭고, 편리하게끔 하기에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입니다. 대도시의 방식으로 도시가 부강해졌고, 풍요해졌습니다. 그곳에 요나는 재를 뿌리러 가야합니다.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나도 도시의 방식을 옹호했을 수 있습니다. 꺾어진 이스라엘을 다시금 살리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스페인으로 도주합니다. 요나가 살던 당시의 세계관은 스페인이 땅 끝이었기에, 땅 끝으로 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필요도 없고, 아무런 계시 또한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는 확신도 있어 보입니다. 3절에 “주님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더욱 발버둥 칩니다. 요나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온 인류를 굽어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낯을 보고, 여러 접촉과 만남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계는 소홀하게 됩니다. 이는 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누구와 ‘관계’하는 지를 곱씹어야 합니다. 내가 관계하는 사람의 면면이 바로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요나에게 계시하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계시될 것입니다. 또한 그 ‘관계’는 내 안에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요나가 도망간 이유는 바로,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곧 새로운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일상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관계가 지엽적 노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발전되어서, 공감을 통해, 상생의 연대로 발전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