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신념'의 달]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러르는 신앙과 더불어 사회적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신념은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생명, 평화, 진리, 정의, 자유, 평등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과연 신념을 갖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한 해를 반성하며 더욱 든든히 서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강림절 제3주일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삶 가운데로 모셔들이도록 준비합시다.
2. 오늘 오후에는 위원회별 신년 사업계획 회의를 합니다. 위원장 중심으로 회의를 진행하시고 결의 내용을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십시오. 내년도 사업계획에 반영하겠습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2019년 당회를 하겠습니다.
4. 강림절 기간에는 좋은만남 매일묵상을 주보에 싣지 않고 묵상집 '다시 쓰는 희망편지'로 합니다.
5. 성탄절에 세례 받으시고 입교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십시오.
6. 겨자씨헌금 집행을 위하여 다음주까지 12월분 헌금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원을 원하시는 기관, 단체가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이모저모
지저스 페스티벌!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지난여름에 다섯 개의 작은교회(우리교회, 가재울녹색교회, 동녘교회, 모퉁잇돌교회, 백석교회)가 임진각에서 평화통일기원예배를 함께 드렸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연합 운동회를 하다가 뜻깊은 예배를 함께하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아쉬워 다시 한 번 교제하고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목회자들이 모여 '지저스 페스티벌'(예수축제)이라는 예배와 교제 행사를 준비하여 지난 주일에 함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하는 행사로 하고자 하였으나 바쁜 일상 가운데 준비에 나설만한 분들이 없어 결국 목회자들이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회의하는 날 우리교회는 야외예배를 가게 되는 바람에 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하고 결과만 통보를 받아서인지 아무래도 이번 프로그램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주일의 지저스 페스티벌은 매우 뜻깊고 유쾌하였으며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이관택 목사님, 안주영 성도님, 임미화 집사님이 '5분 말씀'에서 성소수자, 경제와 환경,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감동적으로 전해주셨습니다. 또 동녘교회와 모통잇돌교회 교우들이 판소리 공연을 구성지게 해주셔서 색다른 경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이란?'이라는 주제로 나무 타일에 그림 그리는 시간도 좋았고 함께 나누는 점심식사도 좋았습니다. 교우들도 아주 유쾌하고 행복했던 시간이라며 다음에는 우리교회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 축제를 위해서 준비해주신 목회자들과 교우 여러분들, 장소를 마련해주신 동녘교회 교우 여러분, 음식을 준비해 나눠주신 교회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순서를 맡아 발언해주신 분들께도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여 축제를 즐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감리교햇빛발전소협동조합원 만남의 날에 다녀왔습니다.
감리교 햇빛발전소 협동조합 조합원 만남의 날이 지난 목요일 저녁 정동제일교회 인항홀에서 열렸습니다. 협동조합의 올해 첫 태양광 패널 설치 사업이었던 인연으로 우리교회도 조합에 가입하고 만남의 날 행사에 초대받았습니다. 태양광 설치에 관한 토크쇼를 하는데 거기에도 출연하였습니다. 30여명이 모인 조촐한 자리였지만 한 해 동안의 사업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올해를 돌아보니 주택이 대략 8.5%, 교회가 13% 정도 전기(한전 공급분)를 절약하였습니다. 단지 태양광 발전이 활발한 낮 시간에는 전기 사용량이 적어 생산된 전기가 그냥 소멸된다는 것이 아쉬우니 생산된 전기를 한전에 되팔아 사용량을 차감하는 상계형 계량기를 장착할 수 있도록 행정적 협력을 부탁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지키고자 애쓰는 이들이 있어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햇빛 은총'을 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산업안전을 위한 권고안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합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스물넷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가 밤에 홀로 일하다 컨버어벨트에 끼어 숨진지 1년이 되는 지난 10일, 곳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12월 노동 안전과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는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돼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정부는 '고(故)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를 꾸려 올해 8월 조사보고서를 발표, 총 22개 권고안을 내놨습니다. 특조위는 김씨 사망이 원청과 하청이 안전조치 책임을 미루면서 방치해 낳은 참사로 결론을 내고 재발방지책으로 발전사의 경상정비, 연료·환경설비 운전 업무의 민영·외주화 철회, 산업재해 관련 감점지표 개선,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등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는 22개 권고안 중 17개가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고 2인1조 근무 등 나머지 5개도 일부만 지켜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헛되게 생명을 잃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씨가 규정을 무시한 위험한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은지 1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노동자에게는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보다 이윤을 중요하게 여기는 악한 풍토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잘못된 관행과 제도들이 개선되어 더 이상 헛된 죽음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학교란 무엇인가?
1
“학교란 무엇인가?” 질문에 학교가 공식적으로 무엇을 하는 곳인가 찾아보았습니다.
제2조(교육이념) 교육은 홍익인간(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기본법 제1장 총칙, 제2조(교육이념)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1. 인격도야, 2. 자주적 생활능력, 3. 인간다운 삶, 3. 민주국가 발전, 4. 인류공영 이상 실현을 목적으로 교육한다는–이념이니-선언입니다.
교육이념이라는 조항이 독해의 시작에서부터 ‘픽’ 웃게 합니다. 한동안 유행한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가 떠올랐습니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실천되지 않는 선언이 많으면 비웃음이 됩니다. ‘이바지하게 함’,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있습니다. 아이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목적입니다. 교육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좋은 말 대잔치는 부족합니다.
2
“나는 뉴욕시립학교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학생들이 친구들과 교실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구내식당, 체육관, 라커룸에서나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질문, 저자의 주.)”
Chomsky 그렇습니다.
교도소와 도심의 학교는 잉여적인 국민, 즉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교육시킬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입니다.
- 노암 촘스키,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강주헌 (시대의창, 2005), 64쪽.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 미국의 언어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정치운동가, 좌파 학자입니다. 책은 진보적 매체 ‘대안 라디오(Alternative Radio)’의 설립자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이 1992-93년 촘스키와 가진 세 번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학교는 ‘교육시킬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이라는 촘스키의 진단입니다. 과격해 보이지만 진지해야 할 생각거리로 다가옵니다. 그의 핵심어는 ‘잉여적인 국민’, 곧 ‘나머지’입니다.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Industrielle Reservearmee)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잉여를 통해 임금이 결정됩니다. “너 아니어도 돼. 다른 사람 쓰면 되니까.” 학교는 잉여의 수용소입니다.
3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년).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이론가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교사는 “가능한 한 징벌을 행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벌을 주기보다 상을 자주 주도록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징벌의 두려움에 의해서라기보다 포상을 받고 싶은 생각에 의해서 더 고무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로 교사가 부득이 징벌을 행사해야 할 경우라도, 아동에게 징벌을 내리기에 앞서 가능하다면 그의 마음을 휘어잡는 일이 최대의 수확이 될 것이다.”*
* Ch. Demia, 《리용 시의 학교 규정》(1716년), 17면.
-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나남출판사, 2007). 283-4쪽,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의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시험은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이다. 그것은 개개인을 분류할 수 있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가시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 미셀 푸코, 289쪽,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의 부제는 감옥의 역사입니다. 제목과 달리 책의 목적은 감옥의 역사, 근대 형벌 제도의 탄생은 아닙니다. 18세기 이후, 대표적인 처벌 형태인 감옥은 권력의 통제 기구이며 통제 기술의 본모습을 밝히려는 의도입니다.
근대 이후의 학교입니다. 학교는 학생을 ‘고무’시키며, ‘휘어 잡’아야 합니다. 고무와 휘어 잡음을 통해 학교는 학생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착한 학생으로 키웁니다. 그리고 시험입니다. 학교는 시험을 통해 학생을 위계질서 속에 배치하며 상벌제도를 통해 규격화합니다. 학교 역시 감옥과 마찬가지로 군대, 병원, 학교 역시 복종하는 주체를 생산해 내는 권력의 도구입니다.
4
‘스쿨School’, 학교의 어원은 그리스어 ‘스콜레σχολή(scholē)’입니다. 남는 시간, 자유 시간, 휴식, 나태의 뜻입니다. 음악이 연주되는 극장에서, 함께 뛰노는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 추구하는 곳이 스쿨입니다.
그리고 근대가 받아들인 스쿨을 ‘학교’로 번역했습니다. 스쿨을 학교學校로 번역한 것은 그 의미상 적절하지 않습니다. ‘남는 시간’은 ‘배우는 곳’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실제는 정확합니다. 봉건 시대의 단어인 학교는 ‘예의禮儀’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봉건 시대의 예의는 봉건 질서의 유지에 적절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가 실제로 가르치고 학생이 배우는 것은 질서 유지와 질서 순응입니다. 단지 봉건의 질서가 아니라 자본의 질서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학교에서 학생은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학교를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자(莊子, BCE 369?~BCE 286, 중국 전국 시대 철학자)의 제안입니다.
故先聖不一其能(고선성불일기능). 不同其事(부동기사). 名止於實(명지어실). 義設於適(의설어적). 是之謂條達而福持(시지위조달이복지).
때문에 옛 성인은 사람의 능력이란 한 가지가 아니며 일도 같지 않다고 여겨, 실질(實質)에 알맞은 명성(名聲)에 머물게 하고 본성에 합당하게 따라가는 길을 마련했다. 이것이야말로 조리가 잘 통해서 행복을 내내 간직하는 길이라고 한다.
- 장자, 「至樂」,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2010), 455-456쪽.
장자를 따라 학교學校 대신 복지福持라 부르면 어떨까요? 더 이상 자본주의의 값비싼 생산수단이 되기 위한 경쟁에 아이들을 몰아넣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촘스키, 푸코, 교육이념을 돌파해 하나하나의 행복을 살며 말하는 곳일 수는 없을까요? 삶은 구겨 넣어지기가 아니라 향유니까요.
10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 부처님 처소에 있을 때 무슨 법을 얻었다고 보는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때 실로 아무 법도 얻으신 바 없습니다.
佛이 告須菩提하기를,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然燈佛所일 때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如來께서 在然燈佛所일 때 於法에 實로 無所得이니이다.
“연등然燈은 석가에게 수기授記(뒤에 부처가 될 것을 예언함)를 준 스승이다. 석가여래는 스승으로 말미암아 이끌림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법왕法王이 되었다. 어찌 얻은 바 법이 없다고 하겠는가? 다만 얻었다는 마음이 없을 따름이다. 부처님께서 뭇 보살들이 얻었다는 마음을 여의지 못할까 하여 이와 같이 물으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 얻은 바 없다고 대답했다.”(陳雄)
“백락천白樂天이 관선사寬禪師에게 묻기를, 닦은 바도 없고 깨달은 바도 없다면 범부와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셨다. 범부는 어리석어서(無明) 이승二乘에 집착하거니와 이 두 가지 병(어리석음과 집착)을 여의면 그것을 이름하여 참된 닦음(眞修)이라 합니다. 참되게 닦는 사람은 애쓰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니,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게으르면 어리석음에 떨어집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열쇠이지요. 이는 초학입도初學入道의 법문法門입니다. 법을 얻은 바 없다는 말씀은 수보리가, 여래의 자성自性이 본디 맑고 깨끗하여(淸淨)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무 얻은 법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에 두 가지 차원이 있따. 우리는 그 두 가지 차원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물결wave와 같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차원historical dimension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하나는 물water과 같다. 그것을 우리는 궁극적 차원ultimate dimension 또는 열반nirvana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물결을 경험한다. 그러나 물을 경험하는 법을 발견할 때 우리는 명상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열매를 얻게 된다.
역사적 차원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 당신은 슬퍼한다. 누군가 당신 곁에 가까이 앉아 관심을 보여 주면 위안을 느낀다. 그의 우정과 부축을 받고 따뜻한 손을 잡는다. 이것은 물결의 세계다. 물결의 세계에는 탄생과 죽음, 높음과 낮음, 존재와 비존재가 있다. 물결 하나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러나 물의 세계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거기에는 태어남도 죽음도, 존재도 비존재도, 시작도 끝도 없다. 물의 세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사물을 그것의 궁극적 차원에서 보게 되고 태어남과 죽음, 시작과 끝, 존재와 비존재 따위 관념에서 벗어난다.”(틱낫한, Touching Peace. 10장)
세존은 지금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 두 차원에 함께 있다. 그러므로 연등 부처님한테서 법을 얻은 바 있다고도 말해야 하고 얻은 바 없다고도 말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도 장차 올 나라이면서 지금 여기 있는 나라다. 물을 떠나서 물결이 있을 수 없고 물결이 없으면 물도 없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 앞에는 항상 4가지 질문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①“당신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가? ‘예’인 것을 과감히 붙잡고 ‘아니오’인 것은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인가?
②“당신은 올바른 판단력을 가졌는가?”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고 살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옳고 그른 것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적당히 살지는 않았는가?
③“당신은 진정 인격적으로 성숙했는가?” 당신의 생활 속에서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능력보다는 성품, 말보다는 인격이 앞섰는가?
④“당신은 열정을 가지고 정성과 충성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인가?” 매사를 기분에 따라 살아가지는 않았는가?
어떤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하십니까? 내 젊었을 때 좌우명은 지혜여도(智慧如刀) 단(斷)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날카로운 칼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무뎌지면 안되니 지식의 숫돌을 준비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칼집에서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40대를 넘기면서 좌우명을 유수불상쟁(流水不相爭)으로 바꾸었습니다. 흐르는 물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다른 길을 받아들이고 내 길을 간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만 섞이지는 않다 보니 여전히 맘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수여풍(如水如風)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맡기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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