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신앙은 세상을 향한 여정입니다
성서본문 ; 창세기 12,1-4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들어가며 : 대강절을 보내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탄생의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성도들에게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사는 항상 이맘때가 되면 고민입니다.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하여야 뜻 깊고 우리 삶에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날로 만들 것인가 하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아름다운 추억이 될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고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지난 경험으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탄의 의미를 히늘나라 보좌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음으로 우리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이신 아기 예수 어쩌구저쩌구 하는 복잡한 이야기로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만나는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그 먼 곳에서부터 이 낮고 낮은 곳, 우리가 사는 바로 여기로 오셨는데 왜 우리는 자꾸 그 예수님을 뜬구름 잡는 하늘에서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예수님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신앙은 자신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이 대부분 가장 익숙하고 가장 친숙하고 가장 만만한 어떤 상황을 벗어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명령일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곳, 네가 난 곳, 네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이 바로 익숙하고 친숙한 배경, 홈그라운드를 의미합니다만 하나님은 잠시 다녀오라는 것도 아니고 굳이 거기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기꾼 같은 야곱도 고향을 떠납니다. 꿈쟁이 요셉도 본의 아니게 고향을 등지고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는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예레미야도 원치 않지만 유다 백성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길을 나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자기가 잘 아는 땅, 고향 집에서가 아니라 낯선 땅에서 완성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게신 여러분들도 그런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원래 다니시던 교회를 떠나서 혹은 교회를 정하지 못하시다가 우리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을 만났으니 어쩌면 신앙이라는 여행을 하시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닌가 합니다.(아직 못 만나신 것 같다고요? ㅋㅋㅋ)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의 집안 문지방도 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집 안방이나 마당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야 만날 수 있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울타리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틀을 넘어서야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울타리, 기독교라는 영역,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 하나님은 교리적으로 설명되는, 성서 속에서, 주석서 속에서, 정형화된 형식적 이야기의 틀 안에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비슷한 것을 하면서 좋아라 하는 독특한(?) 사람들의 모임 속에서, 신화처럼 존재하고 전설처럼 군림하시는 분이시기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마치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황홀해 있는-이것을 자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처럼, 2천 년 동안 쌓아올린 교리와 교조, 각종 신학의 성채 안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만족하면서 여기가 신앙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동안 정작 하나님은 제대로 만난 적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에게만 쏠려 있는 관심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볼 줄 아는 거울을 집어치우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하고 거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한 경제학자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럽 사람들과 일본사람은 다른 나라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다른 나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열망이 큽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지구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접촉을 하고 교역을 하였고 지금 (물론 부정적인 제국주의 정책도 있지만) 소위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반면 중국은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남이 뭘 하든 그저 독불장군처럼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사람들은 15세기 초에 317척의 군함이 2만8천 명의 수병을 태우고 인도네시아 해협과 인도양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26년 간 항해를 했다고 하니 엄청난 항해술과 조선능력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항해의 목적이 조공을 받고 황제의 자비를 베풀고 선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어쩌면 소위 ‘중화’라는 자기의 틀 안에 갇혀 사는 꼴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해상국가로써의 기백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후에는 돛이 두 개 이상 달린 배를 만들면 처형을 했고 대외교역도 금지하는 등 임금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바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중국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눈을 뜨니까 엄청난 도약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은 그 자신을 건강하게 하고 살지게 하지만 자기만을 향한 마음은 결국 그 자신을 자폐아로 만들어버린다는 이 심각한 현실은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여기 이 땅의 한 가운데 사람들 틈으로 들어오셨는데도 그 예수님을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저 세상, 구름 떠다니는 세상, 피안의 세계, 소위 영적인 세상, 교리와 신조 안에서 찾고, 심리학적 자극을 통해 감상적으로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한 가운데로 오셨는데 교회는 자기들끼리 새벽송을 돈다, 성탄예배를 성대하게 하고, 성탄절 칸타타(이것도 있나요, 부활절 칸타타는 알겠는데?)를 하고, 이브 올나이트를 하고, 성탄절 헌금을 잘 준비해서 그들이 말하는 제단에 바치고! 자기들끼리, 우리끼리, 예수님 계시는 곳과는 담을 쌓고 벽을 두르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신앙은 자신을 향해 온통 쏠린 관심의 방향을 돌려 세계로 이웃에게로 세상의 한 복판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까지 가려면 먼 여행이 필요하리란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를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사거리를 세 개쯤 지났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한 늙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우두커니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공원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가방을 열었다. 음료수를 꺼내 마시려다 말고 소년은 할머니가 배고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그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들고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할머니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소년은 그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었습니다. 할머니는 또다시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소년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그날 오후를 그렇게 먹고 마시고 미소 지으면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밖에는 다른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려고 배낭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소년은 뒤돌아서서 그 할머니에게로 다가가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소년에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잠시 후 소년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행복한 표정을 보고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했길래 넌 이렇게 행복해 보이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 전에 소년이 덧붙였습니다.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여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다구요."
그러는 동안 그 할머니 역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의 아들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행복한 표정이세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아들이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는 덧붙였습니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나가며 : 세상은 온갖 악한 쓰레기들로 범벅이 된 곳이라고 교회에서는 말합니다-여기도 교회이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온갖 죄의 쓰레기더미가 있는 곳에 청소부로, 고상하게 말해 치유자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고 지금도 바로 그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쓰레기더미의 악취를 피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그 쓰레기더미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치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작전을 짜는 곳입니다. 이 말은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 가장 익숙한 곳, 가장 친근한 곳이 아니라 세상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여러분의 영혼을 가두지 마시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황홀감에 빠지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온통 자신, 교회에 쏠린 관심을 돌려 세상을 보고 세상으로 나아갈 힘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아기 예수님이 이 귀한 성탄절에 우리를 생각보다 훨씬 젊은 모습으로 맞이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성도 여러분께 충만한 평화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