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탄절
성서본문 ; 마태복음 25:34-40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들어가며 : 예수님이 가장 연약한 사람, 그것도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지냈습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장 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성장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 삶에도 가장 약하면서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하나님의 뜻을 잘 나타내는 귀한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나심으로 기뻐하는 이 땅의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성탄절이면 가장 많이 인용되고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롤과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구두쇠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만 성냥팔이 소녀는 결국 꿈을 꾸면서 싸늘하게 죽어간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성냥팔이 소녀를 보면서 참 가슴이 아픈 것이 그날이 하필 크리스마스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성냥팔이 소녀는 추운 성탄절에 알콜 중독자이며 무능한 아버지에게 내몰려 성냥을 팔러 거리로 나섭니다. 그런데 그가 거리에서 들여다본 어느 집은 따뜻한 분위기에 가족이 즐겁게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유리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절망과 고통, 추위에 겨워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성탄절인데, 왜 그런 비참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가 아쉬움과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 상황에서 아기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환한 불빛 아래 행복에 겨운 가족들 가운데서 함께 웃음꽃을 피우셨을까, 아니면 성냥을 하나씩 켜면서 불꽃 속에서 환상을 보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소녀와 함께 아파하면서 죽어가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가족은 굳이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아도 행복했을 테지만 그 소녀에게는 예수님이 꼭 필요하였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을 것입니다.
오늘도 비슷한 정경이 펼쳐집니다. 성탄절이면 대형교회에서는 화려하고 장엄한 미사나 예배가 진행됩니다.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머리에 반짝반짝 기름을 바른 신사 숙녀들이 장의자에 쭉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매끄러운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떡이며 파이프오르간 반주에 맞춰 잘 가다듬어진 목소리로 성탄찬송을 부릅니다. 청년, 학생들은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신이 납니다. 교회학교에서도 선물을 준비하여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무도가 꿈꾸는 성탄절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 밖에서는 추위에 떨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 죽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과연 어디에 계실까요? 예수님이 꼭 함께 하시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면 굳이 가시지 않으시겠죠. 예수님 없이도 즐거울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흥에 겹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충분히 자기들끼리 행복한 곳, 그래서 정작 예수님은 계시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라도 함께 하시지 않으면 너무나도 힘에 겨워할 만한 이들, 그래서 예수님이 기꺼이 함께 계시는 그곳으로 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성탄절에 우리는 용산에 가서 철거민 참사 유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5-600명 정도 모였다고 합니다. 많이 모였지요. 그러나 전체 기독교인들의 비율로 보면 한 줌도 안 되는 적은 인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몇 천 배 몇 만 배 되는 기독교인들은 용산을 쳐다보지도 않고 오히려 폭도라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 되는 인파가 그 자리에서 고난 받는 유가족들과 함께 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소도 협소하고 시설도 제대로 안 돼 있었고 준비도 미흡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잘 안 들렸지요. 한편으로는 그게 과연 예배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예배가 무슨 종교의식으로만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가대가 있느냐, 악기는 얼마나 좋은 것을 쓰느냐, 설교가 듣기 좋았느냐, 예배 구성이 짜임새가 있었느냐 등등.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 짜임새 있고 신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장엄하고 놀라운 종교의식으로써의 예배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의식으로써의 예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의 예배를 요구하셨습니다. 삶도 어떤 삶인가, 바로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이를 보고 찾아가는 삶의 예배를 요구하셨습니다.
주전 8세기경 후기 이스라엘 시대에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전성기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사야, 미가, 호세아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풍성한 물질로 성대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연일 엄청난 규모의 종교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미가 6장을 보면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렇게 성대하고 어마어마한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고 일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비로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동포를 착취하고 억압하고 재산을 강탈하여 축재한 재산으로 하나님께 성대하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식에 하나님의 뜻이 살아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성탄절 예배 때 제 속이 좀 탔습니다. 자리에 앉지도 못했고, 한 시간이 넘도록 바람을 맞으면서 서있었습니다. 성탄절 성만찬도 부족해서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북적대고 무슨 시장바닥처럼 어수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성탄절 예밴데 격식을 갖추고 의식에 맞게 드렸어야 하는데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음을 모아 진심을 전달할 시간도 얻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이번 예배에 대한 설명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모로 아쉽고 속상하고 성도님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잘 했다고, 목사로써 선택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을 했다고 믿기로 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보고 그들과 함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된 성탄절의 의미를 살렸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렸다고 확신합니다. 장엄한 성탄절 칸타타는 없었지만, 반짝이는 성탄장식도 없었고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이를 보고 찾아가는 시간이었기에 이번 성탄절은 그동안 드렸던 그 어떤 성탄절보다도 더 성탄절스럽고 성탄절틱하였고 성탄절다웠습니다.
나가며 : 물론 우리가 예배를 잘 준비하고 구성도 짜임새 있게 하여 드려야 합니다. 깨끗한 옷을 잘 차려 입고 와서 설교도 주의 깊게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제사규정을 자질구레한 것까지 세밀하게 규정하여 그대로 해야 한다고 구약성서에 써놨지만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예배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가 삶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 예배가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낮잠을 자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참된 예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이웃을 돌아보고 이웃과 나누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탄절 예배를 통해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 걷고 삶으로 따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동행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