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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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0일 사순절 제2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여기, 없는 사람'

 

이관택

본문: 마가복음 8장 22~25절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일주일에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횟수가 얼만큼 되십니까?

각자 지난 주를 한번 잘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난 2번 이상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5번 먹었다. 10번 먹었다.

질문)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을 부를때 보통 뭐라고 부릅니까?

 

 

동영상 [여기, 없는 사람] 상영

 

 

보통 사람이 가장 자존심이 상할 때가 언제 인가요? 무시 당했을 때 입니다. 무시당한다는 것은 “없인여김”을 받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여기 분명히 있는데,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나를 대하면 우리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정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평가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냐로 인해, 내가 비로서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죠. 저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청소도구를 꺼내서, 청소를 합니다. 운동장을 걸어가면서는 땅만 보면서 쓰레기를 줍고, 쉬는 시간에 우리들이 말뚝박기나 공기놀이를 하면 항상 그 주변에 빗자루를 들고 있다가 먼지도 쓸고, 가끔 아이들이 버리는 과자봉지, 껌종이 같은 것도 땅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줍습니다. 사실 다른 얘들도 그 친구에게 묻습니다. 넌 왜 맨날 빗자루를 들고 그렇게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니? 하면 그 친구는 그저 웃습니다. 그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왜 그랬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매번 수업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야! 오늘은 쓰레기 얼마나 줏었니? 하고 물어보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반아이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반 아이들도 그 친구는 참 대단하다!라고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꼭 그 친구가 칭찬을 받으려고 그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달콤한 쉬는 시간! 친구들과 노는 시간 마저 반납하면서 스스로 청소를 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공동체는 그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목해 주는 공동체입니다. 좋은 가족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아주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써주는 가정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 칭찬해 주고 응원해 주는 분위기 속에서는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나오는 대사가 있죠. 두 광대가 시각장애인 흉내를 내면서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어!”라는 대사를 반복해서 주고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그 두 광대가 어쩔수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하면서 절망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그래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 한양으로 가는 거야! 라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너는 거기 있다! 라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 세상 어떤 누구도 나를 인정하지 않지만 너는 나를 인정하고 나는 너를 인정하겠다는 신뢰! 이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바로 이 세상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숨은 곳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라고 라고 이야기하시는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밥을 나누고 삶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9-10절을 보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부활하자마자 그 전에 내가 부활하면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 있을 것이다. 너희를 꼭 만나겠다. 라고 예언하신대로 제자들을 한명씩 한명씩 찾아가시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던 요한에게 먼저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예수님의 제자로도 인정 받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평안하냐?”라고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제자로 인정 받지 못했던 여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또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 진 것은 아마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성들을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제자로 인정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 여제자들도 분명히 예수님 곁에 있었죠. 하지만 성서에는 마치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 분명히 있었지만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여제자들을 먼저 찾아간 것입니다.

 

아까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여기, 없는 사람]입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점점 늘어가는 것이 바로 식당입니다. 흔히 식당아줌마라고 우리가 부르는 여성식당노동자들의 수도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소비하고 사먹는 만큼 누군가는 우리가 소비하는 음식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제공해 줘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마도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중년여성 중에서 식당에서 일을 해보지 않은 분은 얼마나 있을까? 제가 힘들게 살아서 그런지 제 주변 분들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식당에서 노동했던 경험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영상에서 ‘숯불갈비는 무서운 음식’이라고 합니다. 저도 벽제 농원이라고 고양리쪽에 가면 엄청 큰 갈비집이 있는데, 그 곳에서 며칠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진짜 숯불갈비는 무서운 음식이더군요. 숯불 만드는거, 반찬 나르는 거, 고기 굽는거, 가장 대박은 불판 닦는거죠. 힘든 것도 힘든 건데, 식당 노동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있는데, 분명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현재 식당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있는데, 없는 것처럼 없임여김을 받는 것이죠.

 

 

요즘 유행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비공식 돌봄노동]입니다. 돌봄노동은 방금 이야기한 식당노동자를 비롯해서 청소 노동자, 요양보호사, 가정 관리사 등등 흔히 가사노동이라고 불렸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돌봄노동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제공해줍니다. 밥, 의복, 청결, 보살핌, 관리 하지만 돌봄노동 앞에는 언제나 비공식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노동으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홍대의 청소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것 다 알고 계시죠? 청소노동자 파업이라는 말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 그 파업을 이끄신 분들은 그냥 평범한 아주머니들이었습니다. 한끼 식대로 약 300원정도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잘 쉬지도 못하고, 병가도 못냅니다. 그리고 수시로 그만나오세요 라는 말을 학교측에서 하는 거죠. 그리고 제대로 쉴 곳도 없고, 식사를 할 곳도 없습니다. 그저 눈에 안뛰는 화장실 안에 붙어 있는 창고같은 쪽방이나 사람들이 잘 안다니는 계단 한켠에서 식사를 때우고, 피곤을 달래야 되는 실정이었죠. 지난 주에는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의 청소 노동자들이 모여서 또 시위를 했습니다. 소위 우리나라에서 가장 학식있고,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들에서 조차 돌봄노동은 ‘비공식’입니다. ‘비공식’이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이 바로 비공식입니다. 사회적으로 용인해주고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좋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라고 했습니까? 모두에게 주목해주고, 인정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들의 삶을 [공식]적인 삶으로 인정해주고, 모든 이들의 노동을 공식노동이라고 인정해 주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일텐데, 한국사회는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에는 벳세다의 시각장애인이야기가 나옵니다. 벳세다는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나 곳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한 시각장애인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 마을 공동체는 참 괜찮은 곳이었나 봅니다. 어찌되었건 예수님과 그 시각장애인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 바깥에 나간다는 것은 특히 감으로, 익숙함으로 그 마을안에서만이라도 근근 나다닐 수 있었던 이 시각장애인에게는 매우 겁이 나는 사건입니다. 공기가 다르고, 땅의 촉감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눈을 감고 살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자신의 마을이 좋았을 텐데, 아니 편했을 텐데, 그 곳을 벗어나니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마을을 벗어나시자,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두 눈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안수하시면서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사람이 쳐다 보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 구절은 이상하게도 그 시각장애인의 감정과 표현이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우 담담한 듯합니다. 다른 때에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거나 하시면 뛸 듯이 기뻐하고, 감사하는데, 반해 이 본문은 참으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각장애인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저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한번 더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시각장애인에게 뚫어지게 자세히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뚫어지게 걸어다니는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그 나무같은 물체들이 서서히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그 나무들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었구나!

 

이 본문은 다른 기적과 치유사화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짧기도 하고, 감정이 극도로 자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 시각장애인과 같아야 한다고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무지해서 바로 내 옆에 있는 소중한 단 한 사람도 잘 보지 못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식당 노동자, 청소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내 옆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 또한 알아 보지 못하는게 우리의 삶이죠. 분명히 내 옆자리에 존재하고 나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는데,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나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십니다.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의 실체는 실상 너무나 익숙하고, 안일하고 편안한 나의 일상인지도 모릅니다. 마을을 벗어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기 위한 하나의 실천입니다. 내 옆에 있는 식상한 사람을 특별하게 보기 위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을을 벗어나자, 그 동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물건처럼 보였던, 마치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드디어 내 옆의 소중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이 사람이 나와 감정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는 소중한 사람이구나 비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옆의 분을 한 번 보시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마을 밖을 벗어나면 불가촉천민이라해서 죄인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 그러니까 마을 공동체에서 쫒겨나서 사는 것이 당연한 사람. 마치 인간이 아닌 나무와 같이 보여지는 사람들을 그 시각장애인은 눈을 뜨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저께 한 노점상을 하시는 할머니가 노점을 단속하는 이들과의 충돌로 결국 죽게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은 뉴스에도 안나옵니다. [비공식]인간의 [비공식]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새롭게 보기를 하셨습니다. 남제자들에 비해 가려져있던 여제자들을 먼저 만나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사회의 수많은 [비공식] 인간들을 만나 [공식]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순절에 우리는 40일 금식이나 철야기도 같은 엄청난 결단을 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먼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식당노동자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여기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으로 대하면서 고맙습니다. 잘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그런 결단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장 오늘 내 옆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우리를 위해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주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작고 소소하지만 실은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담은 실천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신앙의 길입니다.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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