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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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513일 부활절 제6주일 및 어버이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두 사람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5:1-9

1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9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진정으로 절실한 삶의 소원이 있는가?

오늘은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한 삶의 소원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너무나도 절박하고 절실한 소원이 있습니까? 이것만 이루어지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소망과 비전의 신앙입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하나님의 계획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이 우리의 에티튜드입니다. 절실한 신앙의 자세이자 태도입니다.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 자체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실하게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오늘 이야기 나눌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두 명다 중풍병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평생을 통해 꼭 이루고 싶은 절실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무엇이 절실했을까요? 바로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고, 사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이 질병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중풍병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평생을 남과 다르다는 열등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면서 살아왔던 이들이기에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되는 이들입니다.

 

첫번째 중풍병자

함께 나눌 첫 번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38년째 중풍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거의 나면서부터 중풍병자입니다. 그는 수많은 세월을 줄 곧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근처에 앉아 있습니다. 왜냐면 이따금씩 천사가 내려와 이 베데스다 연못을 휘젓는데, 그리고 그 연못에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의 몸은 완전히 치유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기다리면서 연못가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수십년을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는 무엇을 말합니까? 진짜로 이따금씩 병 고침을 받는 역사가 그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몇 년의 한번이기도 하고, 몇 달에 한 번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병자가 거기 있는 이유는 그는 아직 고침 받지 못했다.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치유를 받고 그 자리를 떠나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그 모습들을 바라만 봅니다. 그리고 더욱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뭐라고 합니까?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움직 일때, 나를 연못에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나는 못해! 다른 사람은 다 잘하는데, 나를 데려가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불만입니다. 시대에 대한 불만입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이 사람은 그 베데스다 연못이 아니라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두번째 중풍병자

두 번째 중풍병자는 마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네 친구와 함께 지붕을 뚫고 천장을 뚫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만난 중풍병자입니다. 예수님이 조금 유명해졌나 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벅적벅적합니다. 아마도 중풍병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으로 보여지는 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만 사람만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잇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요. 이미 사람들이 그 문 앞을 가득 메웠으니까! 매번 그랬듯이 네친구들과 이 중풍병자는 절망합니다. 한 두 번도 아니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에 한 친구가 이야기 합니다. 지붕을 뚫어버리자! 결국 이들은 지붕을 뚫고 침상채로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또한 결국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됩니다.

 

이들의 공통점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둘 다 절박한 상황이었다. 둘 다 중풍병자였습니다. 이 절망은 수십차례 반복되는 아픔입니다. 별의 별짓을 다해보는 경험 속에서 소망보다는 포기가 희망보다는 절망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38년이란 세월을 생각해 보면 거의 평생입니다.

 

이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모두 현실적인 벽이 이들을 가로 막고 있았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천사의 연못이 아니라 차라리 악마의 연못입니다.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 오직 한명만이 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요? 그것이 희망인가요? 천사가 내려왔다가 물을 휘젓고 올라가면 그 때부터는 연못에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한 죽음의 레이스가 펼쳐집니다. 서로를 잡아 당기고 어떻게 해서라도 먼저 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사지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누가 연못에 데려가겠습니까? 자기 살기 바쁘지. 1등만이 살아남는 세상은 이리도 비참합니다. 이 비참한 현실, 경쟁하고, 싸우고, 자기도 살아남기 힘든 그 레이스에서 이 중풍병자는 더큰 절망을 느낍니다.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다른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갔는데, 사람들이 꽉들 어차서 못 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예수님이 조금 유명해졌습니다. 기적도 행하고, 병자도 고치니까 사람들이 모여 든 것입니다. 보통 예수님같은 유명인사가 오면 어떤 사람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유명한 사람, 실력께나 있는 사람들이 앞자리를 차지했겠지요. 고매한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이 앞자리를 채웠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따위는 감히 그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이 당시 병에 걸린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었고,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들은 이런 현실의 벽 편견의 벽, 경쟁과 차별의 상태 속에서 더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지막 공통점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38년을 병자로 살아왔던 중풍병자가, 그리고 네 명의 친구를 고생시키면서 지붕까지 뚫어야 했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평생을 갈망해오던 그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들의 차이점

너무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점도 극명합니다. 한 명은 38년째, 혼자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누가 나를 저 연못까지 데려다 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미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지붕까지 뚫어줄 친구들이 있습니다.

두 명의 중풍병자 모두 갈망했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을때, 벽에도 부딛쳤으며, 결국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었지만,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해보입니까? 저는 이 두 사람중에 힘들어도 어려워도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리하여 지붕까지 뚫어냈던 그 모습이 참 부럽습니다.

 

든든한 친구같은 신앙공동체

함께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뭘까요? 혼자 믿어도 구원은 받습니다. 하지만 함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기쁘게 구원받는 것, 어떠한 벽이 내 앞에 있어도 더욱 강력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게 주는 것입니다. 지붕 뚫는 이야기에서 중풍병자는 네 친구 덕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 친구는 예수님 안 만났습니까? 결국 중풍병자인 친구 덕택에 이 네 명의 친구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중풍병자만 병을 고치고 친구들은 얻은 것이 없었을까요? 친구들도 함께 그 순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였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참된 구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야외예배 갑니다. 우리가 함께 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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