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베소서 4,24
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제목 : 새사람으로 마무리합시다
들어가며 :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거룩한 날, 거룩하신 은혜를 구하며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우신 교회에 나온 사랑하는 자녀들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 모여 있는데 와서 막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를 하더랍니다. ‘요즘 젊은 놈들은 너무 의지가 약해 빠졌어.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그걸 극복하고 이겨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살이나 하고 말야! 젊은 놈들의 정신상태가 그 모양이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어! 차암 큰일이야, 큰일!’ 그 할아버지는 침을 튀겨가면서 그런 애기를 하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공감이 가십니까?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청년 하나가 들릴락 말락하게 옆의 친구에게 말하더랍니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세계 1위인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웃펐습니다. 웃프다는 말을 아십니까? 웃기지만 슬프다는 뜻입니다. 저도 갑자기 그 할아버지처럼 나이 먹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는 뭘까요? 제 생각에는 ‘세월 참 빠르다!’가 아닐까 합니다. 정말 세월이 참 빨라요. 송구영신예배 드리면서 시작한 2015년 1월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월이 돼버렸습니다. 저는 마흔 일곱 살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빛처럼 빠른 세월 앞에 허둥대다가 때를 놓치지 말고 곱게, 나잇값 하면서 늙어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들어가서 : 벌써 12월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2015년을 시작하면서 되새긴 올해 우리 좋은만남교회의 성구입니다.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2015년을 떠나보내기 한 달을 남겨 놓은 이 즈음에 우리는 과연 올 한 해를 제대로 잘 살았는지, 신앙의 결실을 거두고, 한 살 만큼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었는지, 새 사람을 입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 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한 달이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분량의 성장을 이뤄야 내년 분량의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우선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 이 설교는 누구누구 들으라고 하는 건가보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가장 많이 반성하는 부분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어색한 자리가 너무 불편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미팅을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낯선 여학생들과 마주 앉아 있다 보니 그게 어색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막 떠들다보면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지게 되겠지요. 문제는 생각 없이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실수가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을 하려고 많이 말하지만 오히려 썰렁하게 만들고 결국 어느 누군가를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저질 코메디로 끝나는 적이 많았습니다. 결국 저는 이상한 아이, 싸가지 없는 아이가 되어 여자 친구도 못 건지고 쓸쓸하게 온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버릇이 요즘에도 있습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어색함에 기가 눌려서 어쩌다 내뱉는 말이 정말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거나 제 자신을 스스로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말을 말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본전을 찾았을 텐데 말입니다.
잠언 10:19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입을 조심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저와 우리 좋은만남 교우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임을 고백합니다. 교회에서 가끔 깜짝깜짝 놀라는 말을 듣습니다. 왜 저렇게 말을 하실까, 왜 저런 말을 하지? 물론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것을 들으시면서 똑같은 느낌을 받으신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변명하자면 저는 공동식사 시간에 은혜가 안 되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부정적 판단을 막기 위해서 제가 먼저 해버리는 것입니다. ‘음식이 왜 이렇게 짜?’라고 제가 먼저 말하면 대부분이 ‘정말 왜 이렇게 짜?’라고 하지 않고 ‘간이 적당한데 왜 그러세요. 열심히 준비한 사람도 있는데!’라고 말들을 하십니다. 오히려 저를 핀잔주시지요. 그런 속내가 있었지만, 다들 저한테 뭐라고 하시면서 속으로 눈살을 찌푸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안 그럴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잠언 21,23은 “입과 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좀 비판적인 풍토가 있어서인지 말 한마디를 해도 덕스럽고 배려하는 말을 잘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서로들 깊이 잘 아는 사이가 돼버려서인지 으레 그러려니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나면 흉터가 남듯이 말로 받은 상처도 반드시 흉터가 남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혀에 파수꾼을 세워서 불필요한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말고 깊이 생각하여 배려하는 말, 격려하고 힘을 주고 위로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2. 자주적인 성도의 삶을 살았는가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자주적이라는 말을 하니까 왠지 설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구호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자주성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지만 저는 수십 년 동안 매주일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제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신경 주에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리로써’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자주 말씀드렸으니 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쪽에서부터, from over there'라는 뜻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달달 외우면서 살았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하나님과 우리의 직접적인 대면관계라고들 말하고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마주 서 있는 내가 정말 나인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정말 내가 만나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인지, 아니면 수십 년 동안 설교 들으면서 목사나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주입해준 하나님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그저 가르쳐준 대로 앵무새처럼 줄줄줄 외우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나로서 바로 설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온전한 자기로 인식하고 자시 삶과 신앙의 주체로 살고 믿고 하는 자주성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자시 삶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한호균 성도님이 저에게 ‘왜 교우들이 주일성수를 열심히 하지 않는데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제 직무유기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만 저는 주일에 교회에 못 오시는 분들 중에는 그냥 퍼질러 늦잠 자고 빈둥거리다 늦어서 못 오시는 분들, 크게 중요하지도 않을 일 하느라고 못 오시는 분은 없고, 하필 그 시간에 교회 오는 일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못오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 5일 근무제가 되었으니 그런 일들은 토요일에 다 보시고 주일에는 교회에 오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생각처럼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과연 목사가 교우들의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주어야 할까요? 과거에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사가 그 사람의 결혼 문제까지 관여하면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에게 별로 땡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고 목사와의 관계도 어색해지고 그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방식은 과거에는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에서는 목사가 주제 넘는 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자기의 주인은 자기이고 자기의 삶은 자기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주성의 시대입니다.
교회가 정말 잘 운영되고 성숙해지려면 교우들의 의식이 자주적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나오라고 해서 나오고 이걸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은 자주성, 스스로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다 수십 년씩 교회 물 좀 드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고 일일이 말하고 가르쳐야 할까요? 초심자에게 성수주일의 중요성을 신앙지도 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과연 수십 년째 교인인 분들에게도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하셔도 될 신앙연배들이 다 되셨습니다. 맞습니까?
우리 좋은만남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겠죠. 그럼 현실적 바지사장은 누구입니까? 저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럼 저만 바지사장입니까? 다른 목사님들과 전도사님? 맞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아니죠! 바로 여러분들도 이 교회의 바지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시키고 권사님들이 권면해서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주인처럼 행동할 때 우리 교회는 진정 민주적인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 모두가 주인 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좋은만남교회가 다른 교회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그냥 가서 예배만 드리고 오는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이고 모두가 주인행세를 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자주적 교회, 민주적 교회, 성숙한 자주민주적 교우들의 의무임을 기억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가며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지음 받은 새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걸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처럼 은유와 비유를 써가면서 소위 영적인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모든 특별하고 거룩한 것은 가장 세속적인 삶의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공자가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참으로 의로운 것에 이르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래서 누군가가 대답을 합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을 어찌 알고 어떻게 섬기느냐?’ 하고 되묻습니다. 묵묵부답이자 공자는 ‘보이는 제 부모조차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무슨 하늘을 섬긴다고 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마가복음 7,11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렸다’ 고르반, 즉 부모님께 드릴 것이 남아있지 않으니 불효니 뭐니 하지 말라는 당시의 세태를 예수님이 비판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2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지요. 의로움은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의로운 방법으로 인간을 용서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되었지요. 거룩함은 하늘 높이 계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품이지만 그 거룩함이 낮고 천한 땅, 사람들이 사는 삶의 자리 한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의 어떤 신기한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한 가운데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럼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사는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의롭게 하는 사람이 돼라!’라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용납하라!
2015년을 보내면서 시작할 때 가졌던 결심과 결단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첫 결심대로 새 사람을 입음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여러분들이 되는 과제를 잘 수행하여 한 해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격려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