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 기다림은 오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계속되었지요. 이스라엘은 1,000년이 넘은 세월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려온 은총의 날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날이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말입니까? 그날은 이스라엘을 절망과 어둠 속에서 구원해줄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날입니다.
어둠이 드리운 땅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실 분, 죽음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실 분, 이 세상 모든 죄악을 한 어깨에 짊어지실 분, 모든 폭압과 불의를 몰아내고 공평과 정의를 펼치실 분, 마침내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어 주실 분! 과연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임하실까요? 얼마나 찬란한 능력과 영광의 광채를 발하실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은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것도 황금 용포에 싸여 요람에 누운 황태자가 아니라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입니다. 아기라니요? 독수리 오형제를 복제한다 해도, 신화적 영웅 헤라클레스를 소환한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겨우 한 아기가 왔다는 말입니까?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제 한 몸조차 가눌 수 없는 연약한 아기입니다. 더구나 여관이 없어서 구유에 눕혀 둔 아기는 버림받은 아기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아기가 바로 성탄의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감싸주고 보듬어 안아주고 사랑해야 할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 아기,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그저 주저앉아서 받는 구호품이 아닙니다. 황제의 하사품 같은 그런 거짓 구원은 우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 사랑할 줄 아는 참사람으로 세웁니다. 우리 스스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제 우리도 아기와 함께 일어서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신 주님,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의 희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도 아기 예수님과 함께 새 희망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작은 자들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