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을 줄여서 ‘이태백’이라고 그런단다. 실제로 이십대 청년 절반이 놀고먹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청년 문제가 확실히 풀기 어렵게 된 것 만은 사실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혹은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책방에서 매달 하는 정기 영화 상영회에서 단편영화 <개청춘>(감독:‘반이다’그룹)을 보기로 한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제 삼십대 중반 나이를 넘어가고 있지만 책방에서 이십 대 청년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사는 게 어렵다고 말한다. 심지어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이 모두 어슷비슷하다.
내가 대학로 작은 극장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은 건 이십대 때다. 이십대 중반이었나? 어쨌든 그렇다. 그때 김광석이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광석의 후배가 했던 말을 김광석이 대신 말했다. 그 후배는 이제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갑자기 후배가 김광석에게 말했다. “형, 힘들어.” “뭐가?” “답답해.” “아니, 뭐가?” “답답해…….” 그런 얘기를 한 다음 김광석은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 제목이 서른 즈음이라고 해서 그런지 나는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잘 몰랐다. 진짜로 서른 즈음이 돼서야 그 노래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은 건 김광석이 죽고 내가 서른 즈음 나이가 되었을 때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있을 때였다.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가사가 내 귀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 일도 하기 싫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없었다.
<개청춘> 영화에는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서른 즈음을 향해 걷고 있는 세 사람이 나온다. 책방에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이십 대도 있었지만 그 이상도 많았다. 정식 영화관도 아닌 공동체상영인데 입장료 오천 원씩 내고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려고 버스타고 충남 공주에서 올라온 대학생도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시험문지를 대책 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이 영화를 만든 세 여자 감독이 책방에 도착했다. 다행히 시간이 잘 맞아서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과 감독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많지 않은 사람이 모여서 보는 공동체상영은 이런 게 재미있다. 젊은 감독은 앞에 나와 앉았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돌아가며 느낌을 말했다. 더러는 감독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감독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역시 ‘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쉽게 생각하면 청년문제는 그런 많은 문제 중 일부다. 영화에 나오는 청년들과 비슷한 나이인 감독도 사실은 비슷한 청년문제를 안고 있는 당사자다. 게다가 <개청춘>이라는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다. 세 감독들은 저마다 돈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면 돈 안 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 어떤 사람이 들으면 참 비효율적이고 생산성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럼에도 감독들은 저마다 이 일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세 감독이 <개청춘> 다큐멘터리 기획 회의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 한명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정도 못 받고 돈 안 되는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그에 대한 해답이 <개청춘> 영화에는 없다. 어딘가 해답이 있었다면 지금 청년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말도 안 나올 거다.
관객과 감독은 서로 의견을 이야기 하다가, 느낌을 주고받다가, 칭찬을 했다가, 토론 같은 분위기가 되기도 하면서 한 시간이 넘도록 서로가 가진 생각을 풀어놨다. 그건 영화를 보고 끝나면 무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이면 회사에 출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청년 문제든 무엇이든 그걸 풀어야 할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두 사람이 그 문제를 푸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사회에 작은 관심을 갖고 함께 어울려 문제를 바라볼 때 점점 나아지는 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중간에 나왔던 플라스틱 잠수부가 눈에 밟힌다. 아무리 헤엄쳐도 좁은 대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잠수부 - 우리 모두는 거기 있는 잠수부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좁은 틀에 가둬놓은 대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 듣고는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태백이라는 말은 사오십대를 빗댄 사오정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사오십대는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가져봣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태백은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자조적 울분의 표출이니까요.
이십대 청년이 '놀고 먹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겠죠. '힘들어 하면서 굶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워킹푸어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위킹푸어는 거의 청년층이 해당하더군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는 암울하고 가슴 아픈 분위기입니다.
내가 학교다닐 때에는 '서른 즈음에'와 시대는 비슷하겠지만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를 불렀지요.
이 노래는 제법 비트가 있고 박자도 빠른 신나는 노래입니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저 거친 들녁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이름으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꿈꾸게 될까
아주 작은 울타리에 갇히진 않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빈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까'라는 질문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흔들림 없이 소중한 꿈들을 지켜가자는 격려와 다짐이 이 노래의 전체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이 서른에 우린' 보다는 '서른 즈음에'의 막막한 분위기가 이 시대를 더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고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겠죠.
[88만원 세대]에 보면 저자 우석훈은 청년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면서 책을 정리합니다.
청년들이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고 바리게이트를 쳐라!
청년들이 누군가 자신들의 상황을 풀어줄 것일 기대하면서 끝도 없는 경쟁에 자신을 몰아치지 말고 스스로 이 문제를 정면돌파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정면돌파에 미력이나마 함께 하겠습니다.
청년 여러분, 힘내세요.
그리고 좋은 시간 만들어 주신 이상북에게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