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이 중에서 안타까운 일들은 꼭 발생합니다. 여기에는 예외는 없습니다. 당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드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요. 이 차이는 ‘설마’라는 착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설마’에는 내 주변에 일들을 타자화시키는 마력이 있습니다. 타자화는 간단히 말해서, 나랑은 구별 짓고 구분 짓는 일입니다. 즉, 내 일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짓는 말하기에 서두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자들도 ‘설마’라는 마력에 휩싸였습니다. 곧 우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 그리고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단정이 녹아있지요. 예수님의 예언에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부인합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과 안타까움을 가정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창한 미래를 예상하며, 나의 위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고 전개이지요.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에서 불행한 일과 안타까운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때, 먼저,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과 안타까움의 강도의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 시작은 바로 ‘설마’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행과 안타까움을 확률로 계산하고 여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몸소 받아드리고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아직도 2014년 4월에 머물러 있습니다. 총체적 무능에서 비롯된 참사가 나에게는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사실상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오늘날의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은 정말 간단합니다. 이들의 불행과 안타까움을 우리가 타자화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설마’라는 착각에 머물러 있고, 나는 안전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부인 했듯이, 우리들도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습관이 된 타자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빨리 불행과 안타까움에서 그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양들은 한 곳에 모여 있어야 안전합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순간, 포식자나 불행 그리고 안타까움에 쉬운 표적이 되고, 이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