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5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8월에 작은교회 연합 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 예배를 드리고 각 교회별로 특송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매주일 공동식사 후 잠깐씩 채보란 청년의 지도로 특송 연습을 하겠습니다.
3. 후반기 공동식사 봉사를 위해 사랑방에 비치된 신청서에 원하는 날짜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4. 7월 마지막 주일(28일)에는 방정혁 학생이 공동설교를 해주시겠습니다. 잘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5. 친교문화부에서 공동휴가 공동휴가를 제안하셔서 7월 20(토)~21일(주일)에 야외활동 후 교회에서 프로그램 진행 및 숙박 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7월 생일축하] 양경규 성도님(11일/음6.9), 김형휘 성도님(13일/음6.11), 함옥분 장로님(31일/음6.30)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미안한데 받은 돈 좀 주셔.
어떤 페이스북 친구가 쓰신 글이 재미있어서 요약해서 옮겨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이야기니까 이젠 해도 될 것 같다. 영남지역에 교회건축을 할 때이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용무도 보려는 중에 지갑을 놓고 온 것을 알았다. 차는 안 마시면 되지만 통행료는 내야하고, 중간에 나가서 친구를 찾아 돈을 빌려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저 앞에 교통경찰 오토바이가 보이는 순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경찰에게 가서 '미안한데 받은 돈 중에서 3만 원만 주셔'라고 했다. 적당히 나이 드신 분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랬더니 경찰이 말했다. '나한테 돈 맡겨두셨는가?'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3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신고 있던 긴 장화에서 3만 원을 꺼내 주면서 '별 사람 다 보겠네. 교통이 돈을 받을지언정 교통경찰 15년차에 돈 달라는 사람은 처음 보겠네.' 하였다. 이런 일도
'민중의 지팡이'라고 해도 될까?"
지금은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지만 과거에는 교통경찰이 차를 세우고 면허증을 달라고 하면 면허증과 함께 5천 원, 만 원을 슬며시 끼워서 같이 주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글 쓰신 분은 경찰에게 '어차피 너도 불법으로 얻은 돈이니 어려움 당한 나한테 좀 나누어 달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걸 들어준 경찰도 또 재미 있는 사람인 것 같고 뭔가 정이 느껴집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글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사실은 다 거기에서 거기, 모두가 다 한데 뒤 엉켜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도움 주고 도움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악착같이 살면서 서로 지적질하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씩만 더 둥글둥글하게 살면 세상이 좀 너그럽고 재미있어질 것 같습니다.
“은평동지방 교역자회의를 잘 하였습니다.”
월 1회 열리는 은평동지방 교역자회의가 지난주 월요일에 우리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삼 년 만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교역자회의에는 40여명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예배당이 다른 교회와 달리 좌식이라 불편할 것도 걱정이 됐고 식사할 공간도 넉넉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다들 예배당 예쁘게 수리했다고 말씀해주셔서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사먹지 않고 우리교회가 준비한 떡만둣국이 아주 맛있다며 다들 칭찬해주셨습니다. 교역자회의 손님 맞이와 식사 준비를 위해 함옥분 장로님과 오호숙 권사님, 정지수 집사님이 일찍부터 오셔서 애써주셨고 임미화 집사님도 오셔서 예배 반주를 해주셨습니다. 은혜롭게 교역자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와주신 지방 33개 교회 목사님, 사모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공동휴가, 일정은 나왔는데 장소가 아직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친교문화위원회에서 투표를 통해 공동휴가의 일정을 20-21일로 정하였습니다. 바로 다음주입니다. 야외활동 후 예배당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1박 하는 일정인데 문제는 아직 야외활동 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일이 매우 촉박합니다. 일정은 정하였는데 구체적 프로그램이 정해지지 않아 자칫하면 무산될지 모를 위기입니다. 부디 좋은 의견들을 내주셔서 여러분의 의견대로 즐겁게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일 무역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및 성노예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판결에 일본이 무역제재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이 위안부 문제의 치유를 위한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에 보복하고자 수출 절차 간소화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또 한국이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수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하며 제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의 소재를 수입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상의 자리를 마련하였지만 일본은 협상 대표를 홀대하고 창고 같은 곳에서 회의를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하여 면부를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특히 한국을 만만하게 보고 있어 한국민의 분노가 치솟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해치는 아베 정권의 패권주의적 막가파 정치 행보는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무분별한 대결의 댓가는 고스란히 양국 국민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전쟁과 범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지만 이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고 오히려 동아시아 패권국이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분쟁과 증오로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아베 정권이 평화의 자세를 갖게 하시고 상처뿐인 대결이 속히 종결되게 하여 주십시오.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3:24-30(새번역)
예수님께서는 참 도깨비 같은 분이십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출몰하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날 죽어가는 사람 곁에 계시질 않나, 어두침침한 무덤가에서 난동을 피우던 귀신들린 사람을 상대하시기도 하고, 심지어 세리의 집에서 축배를 드시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기행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위험해 보입니다. 당시에 있어서 이러한 행동들은 금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범죄자로 낙인찍혀 어려움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꾸준히 가지 말아야 할 곳, 있어서는 안되는 곳에서 등장하니 세간의 사람들에게 예수일행의 행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당시의 종교 권력자였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일행의 길을 막아서고, 시비를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당국자들 역시 예수일행의 여정에 눈독을 들이고 서슬파란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와 그 일행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난 바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금기의 영역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미 예수일행을 향한 적들의 추적과 위협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시기에 일어난 '오병이어' 사건은 온 갈릴리 지역을 술렁이게 할 것이 뻔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처럼 적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만 한 건수였겠지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일이 어찌 불법이 될까? 하지만 더 이상 따지고 대응할 겨를도 없습니다. 제국에게 식민지배를 겪고 있고, 소수의 종교 권력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라는 통제사회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권력의 통제에 복종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질서'라는 미명 아래 권력자들은 사람들의 일상 여기저기에 시퍼런 경계선을 쳐놓고 그 선을 넘지 말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예수의 일행이 기적을 일으키고도 서둘러 자리를 뜬 이유는 아마도 적들의 추적과 협박이 더욱 집요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하시는 스승마저 남겨 놓고 먼저 배에 올라타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사나운 풍랑까지 만나게 됩니다. 권력자들의 추적에 겁을 집어먹은 제자들은 이제 사나운 풍랑 앞에 절망합니다.
기도하시느라 뭍에 남아있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겐 예수님의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보였습니다. "유령이다!" 한 제자가 겁에질려 소리쳤을 때, 예수께서는 평안한 얼굴을 보이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 예수께서는 배 밖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배 안에 있는 제자들과 평안한 얼굴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배 밖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이는 적들의 위협에 쫒겨 서둘러 기적의 현장을 떠난 제자들과 그 위협에도 불구하고 홀로 그 곳에 머물러 평안하게 기도를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견줄수 있습니다.
권력이 쳐 놓은 경계선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과 경계선 밖에서 기적의 기쁨을 맛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린 어디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집요할 정도로 경계선 밖에 계십니다. 그 경계선 바깥이 자유의 원천이자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료한 마음을 달래줄만한 책 한 권을 찾았습니다. 학생회에서 아이들이 책모임으로 읽은 책인 모양인데 '연금술사'가 손에 잡혔습니다. 아이 말로는 재미있기는 한데 자기는 무슨 뜻인지 좀 어렵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 역시 책을 스토리 중심으로 읽어가기 때문에 의미 찾기는 좀 어리숙한 편이지만, 출판된지 꽤 오래됐음에도 아직 읽어보지 못하여서 펼쳐보았습니다. 나름 장편소설임에도 술술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금을 만든다는 황당한 기술인 연금술, 긴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현혹돼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비웃음만 샀던 '연금술사'라는 제목을 가졌지만 읽어보니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과 그것을 열어나가는 노력과 투쟁, 영감에 관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교육을 받아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세상을 더 많이 보고 싶어 양치기가 된 청년 산티아고가 우연히 살렘 왕 멜키세덱을 만나 '자아의 신화'를 알게 되고 자신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찾아 무모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역경도 겪지만 포기하지 않고 모험을 계속합니다. 사막에서 길이 막혀 잠시 머물게 된 오아시스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운명적 여인과 명망 높은 연금술사를 만나지만 안주하지 않고 이집트로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결국은 자신이 꿈꾸었던 보물을 찾고 자아의 신화를 이룬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목숨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자아를 의미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돈과 명예, 권세를 얻기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과연 자아를 갖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되새겨 보았습니다.
있는 바 일체 중생의 무리 곧 알로 태어난 것, 태로 내어난 것, 습기로 난 것, 바뀌어 난 것, 모양 있는 것, 모양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 내가 이 모두를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하리니 이와 같이 양도 없고 수도 없고 가도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은 멸도를 얻는 중생이란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여,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여 而滅度之하리니 如是로 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이나 實은 無衆生得滅度者니라. 何以故인가? 須菩提여,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卽非菩薩인 까닭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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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중생衆生이라 부른다. 위로 제천諸天에서 아래로 준동蠢動(벌레들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있음을 면치 못하니 그래서 말하기를 일체 중생이라 한다. 중생이 비록 수도 없고 끝도 없지만 아홉 가지 종種을 벗어나지 못한다.”(王日休)
“일체 중생이 본디 스스로 구족具足하나 업業을 따라서 보報를 받는다. 그런 까닭에 무명 無明은 난생卵生이 되고, 번뇌포라煩惱包裸는 태생胎生이 되고, 애수침음愛水浸淫은 습생濕生이 되고, 홀기번뇌忽起煩惱는 화생化生이 된다.”(<敎中經>)
생명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고 죽는 길을 끝없이 밟는 것이 곧 중생의 운명이다.
부처님은, 당신께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무여無餘란 더 이상 습기習氣와 번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의 음역音譯인데 원망청정圓滿淸淨하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러니 번뇌 망상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옹근 열반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서 무여열반이다. <증도가證道歌>에 “달자들이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達者同遊涅槃路)”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註에 이르기를, 열반이란 곧 불생불멸이니 열涅은 불생不生이요 반槃은 불멸不滅이라고 했다.
멸도滅度란, 일체 습기習氣와 번뇌를 없이 하여 삶과 죽음의 큰 바다를 건넌다(度)는 뜻이다.
중생이 삶과 죽음의 큰 바다를 스스로 건너가는 게 아니다.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令) 그 바다를 건너 무여열반에 들게 하신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께서 수도 없고 양도 없고 가도 없는 중생을 멸도시키시지만, 실實은 멸도한 중생이 없다고 하신다. 멸도滅度라는 말은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없다는 뜻이겠다. 선물을 주었는데, 그래서 저마다 선물을 지니게 되었는데, 실제로 선물을 받은 자는 없다는, 말하자면 그런 얘기다.(계속)
공자(孔子)는 군자인 체하는 사람을 향원(鄕原)이라 하여 ‘덕을 훔치는 자’라고 했다.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향원에 대하여 맹자(孟子)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어딜 가더라도 성실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자님은 그를 ‘덕을 훔치는 자’라고 말씀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그를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지만, 그는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혼탁한 세상에 담합한다. 집안에서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듯 하고 밖에서의 행실도 청렴하고 고결한 듯하여,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긴다. 하지만 그와는 함께 요순의 도(堯舜之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를 ‘덕을 훔친 자’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나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들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은 곡식의 싹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간사함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구변이 좋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정나라 음악(鄭樂: 음탕한 노래를 뜻함)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음악(正樂)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 색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덕있는 군자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이다.”라고 말했다.(《맹자(孟子)》「진심장구(盡心章句)」下).
향원(鄕原)은 한 마을의 성실한 사람인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거나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성실함이 자신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겉모양만 덕 있는 군자인 체 처세하기 때문에 공자가 ‘덕을 훔친 자’라고 비판한 것이며,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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