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08.03 18:44

2019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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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통일'의 달]

하나님은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나뉘어진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분단 이익을 위해 평화를 훼방하는 이들을 심판하여 주시고 허리가 잘린지 70년이 넘은 한반도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며 동북아에 평화의 씨앗이 자라나게 하여 주십시오. 온누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시오.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어제부터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 활동으로 수영장 물놀이를 합니다. 함께 해주신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어린이들에게 감사드리며 모든 순서를 잘 마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8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는 셋째 주일(18일) 오후에 하겠습니다.

3. 다음주일(11일)에는 '생명 평화를 일구는 작은교회 평화통일예배'를 임진각에서 드립니다. 교회에서 9시 15분에 출발하겠습니다.

4. 평화통일 연합예배 특송연습 시간을 정하고자 합니다. 오늘 예배 후 30분 연습하거나 주중 평일에 모여서 연습하고자 합니다.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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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젊은이가 궁금해집니다.

   

저에게 왜 머리를 기르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금기에 대한 저항감이 있기도 하지만 짧은 머리보다는 긴 머리를 좋아하고, 미용실에 가는 것이 왠지 귀찮고 그 거울 앞에 앉은 제 모습이 항상 낯설어서 잘 안 가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긴 머리가 많이 불편하긴 합니다. 땀도 많이 나도 머리 감는 것, 감고 난 후 엉킨 머리를 풀어 빗질하는 것도 힘듭니다. 몇 번이나 자를까 생각했지만... 매번 미용실을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묶은 머리를 풀고 있는 것을 아이들이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제 머리가 그 정도로 긴 줄은 몰랐었나 봅니다. 작은 아이가 '예수님'같다고 합니다. 저도 가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 같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피부 색깔에 어떤 외모로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유럽인들이 그린 성화에서 묘사된 하얀 피부, 우아한 갈색 곱슬의 긴 머리를 가진 유럽형 남성 모습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아시아에서 나고 자라신 예수님과는 별로 관계없는 모습입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머리만 길다고 예수님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외모가 아니라 인격과 성품이 더욱 중요합니다. 제가 성화의 예수님 모습처럼 머리는 길지만 저의 표정에는 여전히 분노와 미움, 질투의 미숙한 모습이 많은 것을 보면 예수님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2천 년 전 서아시아에 살던 서른 즈음의 젊은 남자 예수가 궁금해집니다. 성서에서 이리저리 해석되고 높여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젊은이 예수 말입니다. 어쩌면 긴 곱슬머리가 아니라 짧고 뽀글뽀글한 곱슬머리일지도 모르겠지요. 분노하면서도 차분한 표정, 예리하면서도 너그러운 눈빛, 확고하지만 때론 실망하기도 했을 의지, 오랜 여행에 지쳤을 테지만 온몸에서 느껴졌을 열정... 긴 머리가 아니라 그 성품을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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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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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의 축제 여름성경학교가 어제(3일)부터 '갓튜브 월드'라는 주제로 시작되었습니다. 김형휘 성도님이 사리현동 어린이들을 한 차 가득 모셔왔고 강화도 외할아버지댁에 가 있던 규현이와 호현이도 성경학교에 참가하려고 왔습니다. 10시부터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는 에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찬양도 배우고 만들기 시간도 가졌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도 즐거운 시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구산마을공원에서 간단하게나마 물풍선, 물총 놀이를 하였습니다. 오늘 오후에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기로 하였으니 아쉬운 대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동체 놀이도 하고 음식솜씨를 뽐내는 푸드 콘테스트를 하고 시상식도 하였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말씀을 배우고 찬양과 놀이 시간을 가진 후에 영화를 보고 꿈나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산책으로 주일 아침을 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어른들 주일낮 예배를 마치면 점심을 먹고 수영장에 갑니다. 수영장 물놀이를 끝으로 1박2일의 굵고 짧은 모든 일정이 끝납니다. 

기도해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성경학교 준비과정부터 애를 많이 쓰신 임정희 교장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도와주신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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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판결을 내린 한국을 수출우대국 리스트에서 배제하였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많은 민족을 고통 당하게 한 일본이 사죄는커녕 경제적 보복으로 도발하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이제라도 일본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죄하도록 경고하시고 돌이켜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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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교사, 기여? 안기여?”

 

 지난 4월 29일. 저와 아내 정유은 목사는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이하 ‘고난함께’) 30주년 기념행사 무대에 섰습니다. 다름 아닌, ‘고난함께’ 30주년 기념으로 파송하는 ‘평화선교사 발표와 싸인 조인식’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년 말부터 진행된 ‘평화선교사’의 발걸음이 이로써 공식화 되었습니다. ‘선교’의 ‘선’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가 ‘특별한 선교사’가 되겠노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는 자리는 사뭇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대 위에 서서 싸인을 하는 순간 막연했던 선교사라는 정체성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평화선교사’를 준비하는 저의 모습을 조금씩 나누고자 합니다. ‘평화선교사, 기여?’라는 꼭지 제목은 “평화선교사, 맞습니까?”라는 말의 충청도 버전입니다. 

 “기여? 안기여?” 라는 질문 앞에서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100%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선교사’라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진정으로 원하시는 일일까? 또 ‘평화선교’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질문은 질문을 낳고. 그 질문들 속에 연약한 내 모습은 한 없이 부족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면서 준비해야겠지요. 지금까지 항상 저와 동행해 주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평화선교사로 향하는 이 새로운 여정의 길목에서도 동일하게 함께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내년 4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날 때,  누군가 ‘기여?’라고 질문하면 꼭 ‘기여~’라고 답할 수 있기를. 그 귀한 여정을 좋은만남공동체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응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프롤로그에 해당하기에 여기서 그만 줄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평화선교사 제안문>을 조금 풀어서 (몇 회에 걸쳐) 첨부 하려고 합니다. 과연 ‘평화선교사’가 무엇인지?, 제가 어떤 뜻으로 ‘선교’를 떠나려고 하는지를 좀 더 자세히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 ‘평화선교사’란 무엇인가

 

‘평화선교사’라는 말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를 정의함에 있어 ‘평화’란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모든 선교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선취된 ‘평화’의 모습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화’가 모든 선교의 지향점 중 하나이고 이미 ‘선교’라는 단어 안에는 ‘평화’의 개념이 충분하게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평화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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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는 선교의 핵심적 가치가 ‘평화’임을 명시함으로써 선교의 본래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평화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갈등과 적의가 가득한 곳이야 말로 평화가 절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맡은 모든 사역 가운데 평화의 가치가 최우선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선교 현장입니다. 선교란 사실상 낯선 세상, 낯선 타인, 낯선 가치를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앞에 놓인 경계선을 넘어 타자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갈등과 혼란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일입니다. ‘평화’라는 핵심적 가치를 붙들지 않는다면 뒤이어 이야기할 ‘제국주의적 선교’라는 덫에 걸릴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평화선교사는 그 동안 제국주의적이며 공격적인 선교, 양적성장과 개인의 회심에만 치우친 서구교회의 선교정책과 이를 그대로 본 뜬 한국교회의 선교사역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은 명칭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선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고 있는 바, 우리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을 모델로서 ‘평화선교사’라는 명칭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선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꾸준히 실천하려는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 ‘평화선교사’를 파송하는 이유

 

1.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여러모로 한국과 유사한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오랜 식민체제와 전쟁은 아시아 각 나라의 사회전반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이후에 남겨진 상처와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새 시대로의 이행을 가로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극단적인 빈곤과 정치적 폭력, 사회적 갈등 속에서 신음하는 아시아 민중과의 연대는 마땅히 응답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2. 평화 선교사 파송은 사회적/지역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고난받는 이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선교’사역입니다. 

 

3. 평화 선교사 파송은 그 동안 양적 팽창에 집중해 온 한국교회 선교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며 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지난 30년간 한국교회의 선교는 세계에서 2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을 만큼 괄목할 만한 양적성장을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인 태도와 지나친 양적성장 위주의 선교방식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2015년을 기점으로 선교사의 수는 그 증가세를 멈췄으며* 최근 국내외적으로 선교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선교의 틀과 내용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우리는 더욱 래디컬(근본적이자, 급진적인)한 선교사역의 틀 속에서 ‘평화선교사’를 하나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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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화선교사 파송’은 아시아 지역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더욱 폭넓은 통찰과 깊이 있는 국내활동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정보통신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 지구화 사회에서 국경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 민중들이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가고, 한국인이 아시아 전역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풍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평화선교사 파송’으로 형성될 국제적 네트워크는 아시아 현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사회선교 또한 더욱 풍성하게 인도해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평화선교사 파송’은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으로 시작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70년 넘게 분단시대를 살아왔던 남과 북이 서로 어울려 살아갈 평화의 시대는 그저 막연한 기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질적인 문화와 정서를 극복하고 진정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한 시도와 경험을 통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평화선교사’의 사회선교적, 평화선교적 관점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역량은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평화로운 한반도의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한 오랜 준비와 기도 끝에, 2019년 30주년을 맞은 ‘고난함께’가 평화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합니다. ‘평화선교사 파송’은 ‘고난함께’의 선교적 지향점인 인권·통일·평화의 사역을 아시아의 이웃들, 이북의 동포들과 나누고자 하는 소중한 꿈이며, 이 시대의 요청에 대한 거룩한 응답입니다. 

 

* 90년대 초반 1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던 한국교회는 연간 수백퍼센트의 선교사 파송 증가율을 보이며 가파른 속도로 양적팽창을 기록하며 선교사수 27,205명에 육박하였으나 2015년을 기점으로 그 증가율은 0%를 기록했다. (조명순, <수치로 보는 한국선교 현황>, 기독교사상 703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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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것에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 이른바 모양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요, 소리, 냄새, 맛, 느낌과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다.

 

復次 須菩提여 菩薩은 於法에 應無所住하여 行於布施니 所謂不住色布施요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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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법於法’은 ‘모든 것에’로 얼버무려 읽는다.

 

보살의 삶은 그 자체가 보시布施다. 그래야 한다. “보布는 보普요, 시施는 산散이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는 말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이 하고 번뇌 망상과 잡고 버리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도 여의고 널리 베푼다는 밀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보시의 법을 가르치셨으니, 안으로는 일체의 집착을 깨부수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시는데 보살의 보시는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서, 내가 있어서 남에게 베푼다고 드러내지 않으며, 네가 있어서 나한테 받는다고 드러내지 않으면, 중간에 물건이 있어서 그것을 주고받는다고 드러내지 않는다. 나·너·물건 삼체三體가 모두 공空이다. 모자람이 채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보은을 바라지 않고 과보果報를 구하지 않고 베푼다. 범부의 보시는 복리福利를 바라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라, 이는 상相에 머물러 베푸는 보시다.”(龍濟和尙)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사람의 눈·귀·코·혀·살갗·생각이 가서 닿는 대상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 문門을 통해 사람을 바깥 대상으로 가기도 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게 드나드는 것을 살아 있다고 한다. 여섯 문이 막혀 있으면 죽은 것이다.

 

보살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여섯 문이 늘 활짝 열려 있다.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보이는 색과 들리는 소리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머물지 아니함(不住)’은 사로잡히거나 붙들려 있지 아니함(無執着)을 뜻한다. 눈으로 모양을 보되 그 모양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말은, 모양을 보면서 모양에 눈길이 막히지 않고 그것의 실체인 공空을 꿰뚫어 본다는 말이다. 여기 잘생긴 보석이 있다. 보살의 눈은 번쩍이는 보석을 보면서 그 생김새에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보석의 모양을 한 공空을 보고 있는 것이다. 소리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모두가 공이요, 공을 그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눈에는 모든 것이 투명한 유리처럼, 다만 실상實相인 공을 보여 줄 따름이다. 그것들을 보고 있는 나의 눈(코·귀·입···)도 마찬가지다. 삼체개공三體皆空이라,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주고받는 물건도 모두 공이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 공이다. 남는 것은 다만 베풂이라는 행行이 있을 따름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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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노신사가 기차에 올라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바로 옆자리에 자기 여행용 가방을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못 앉게 하고 편안히 여행하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막 떠나려 할 때 한 소년이 와서 그 노신사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노인은 자리가 있다면서 내 친구가 곧 올 거라고 대답했다. 

소년은 노신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그 분이 올 때까지만 앉겠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안고 앉았다.

잠시 후 열차가 스팀을 내뿜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년은 얼른 안고 있던  여행용 가방을 창 밖으로 내던졌다. 

그 노인이 대경 실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년이 친절하게 말했다.

“친구 분은 늦었어요. 기차를 놓쳤으니 가방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 드려야지요”

 

나이가 들수록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이 있습니다.  여유와 배려심으로 넉넉해 지는 사람과 자기 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워  지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후자의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며 그들은  눈 앞에 이익에 집착하며 살던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관계의 높은 담을 쌓고 그 속에 들어가 앉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외칩니다.  가능성보다는 나이에 가치를 두고 판단하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하는  성향을 지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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