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20.12.05 16:27

2020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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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신념'의 달]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러르는 신앙과 더불어 사회적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신념은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생명, 평화, 진리, 정의, 자유, 평등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과연 신념을 갖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한 해를 반성하며 더욱 든든히 서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강림절 제2주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강림절기의 의미를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하여 예배당에서의 대면예배와 줌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3. 다음 주일로 예정되었던 당회는 내년으로 연기하여 구역회와 겸하여 개최하겠습니다. 일정은 추후 알려드리겠습니다.

4. 올해 겨자씨헌금 집행을 위해 가급적 다음주일까지 12월분 헌금을 마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하시는 후원 기관이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5. 교우와 가정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  다음주일(12월 13일, 강림절 제3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이관택 목사 / 기도 : 채보란 청년

봉헌위원 : 재정부장 / 성찬보좌 : 안주영 성도 / 안내 : 임미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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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싱 어게인, 혹시 하나님이십니까?

 

코로나 때문에 외부활동과 대인접촉이 줄어드니까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독서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독서는 신학 서적을 주로 보는데 이야기를 꺼내면 길어져 지면에 쓰기는 그렇고,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 내용을 자꾸 쓰게 되는군요. 

요즘은 노래 경연대회가 텔레비전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트로트 경연이 대세로 돌리는 채널마다 트로트 가수들이 노래를 하거나 광고 화면을 채웁니다. 전 사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싫어합니다. 무슨 가수 공화국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웬 노래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지, 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의 꿈이 가수, 아이돌이 다수라고 하고 동료 목회자들의 자녀들도 가수를 지망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최근에 '싱어게인-무명가수전'이라는 가수 경연 프로그램을 보게 됐습니다. 전체적인 틀은 오래 활동한 무명가수들을 등용하는 경연입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열여덟 개의 음반을 낸 가수, 듣도 보도 못하였지만 내로라하는 현업 가수들도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가수, 전주만 들어도 아?! 하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 주제가를 부른 가수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노래를 더는 부르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않아 좌절한 다양한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받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20201206-02.jpg출연자 중에는 '레이디스 코드'라는 그룹에서 활동했던 한 여가수도 있었습니다. 레이디스 코드는 교통사고로 인해 멤버 한 명이 사망하였고 그로 인해 승합차의 최고 속도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일 이후 그룹은 해체되었고 동료를 잃은 남은 멤버들은 큰 트라우마가 생겨 기쁜 일이 있어도 웃지 못하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며 우울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를 극복해보고자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다들 이런저런 비슷한 상처와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친 목사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하나님이 텔레비전(혹은 텔레비전이 하나님)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에는 정말 쓸데없이 전파 낭비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지요. 광고 수익으로 운영되는 방송사와 프로그램이라는 한계는 분명 있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 아무도 관심 없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웃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새로운 희망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기회를 만든다는 설정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보는 사람들도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며 같이 눈물 흘리고 또 재기를 응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영성적 가르침을 주는 신학 서적을 요즘 읽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이 그 가르침을 더욱 깊이 새기게 돕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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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라는 권면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변화는 경험합니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소위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습니다만 코로나는 그런 관계와 활동에 큰 제약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울감이 깊어지고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때로는 분노감이 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지금쯤이 교회가 가장 바쁜 시기일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도 지내고 곧바로 이어지는 강림절기와 성탄절 같은 교회력 일정들도 있고 한 해를 정리하면서 당회와 구역회 등을 통해 각종 행정적 절차들을 결산하고 또 계획을 세우기 위해 한창 바쁠 때입니다. 대부분 교회가 당장 성탄절 예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그 외에도 교회는 교인들이 동원되고 참여하는 많은 행사와 일상적 일정들이 있지요. 부흥회나 전도 활동, 각종 선교회 모임과 성경공부, 속회 등등 일반 회사 못지않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게 교회 행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올 스톱되었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다 같이 멘붕 상태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삶을 되돌아볼 여유와 사색의 시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시계가 전 세계적으로 멈춰서니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성취했던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거창한 생각은 물론,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가' 하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질문들이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절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들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가족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그동안 가족에게 소홀했던 부분들도 생각납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은 오히려 가족들을 제대로 챙기고 돌아볼 여유조차 빼앗아 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번 우리 삶을 두드리는 질문은 계속 머릿속 한켠에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20201206-03.jpg코로나가 지나가도 우리와 교회는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성공과 인정, 인맥이나 평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 있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존재냐고 다그칩니다. 물질적인 삶만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여백을 가지라고 속삭입니다. 코로나는 거창하게 말해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며 영적인, 가볍게 말해서 인생 고민을 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질문에 답을 준비하라는 다그침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제도적 종교의 부흥이 아니라 교인 개인들의 존재와 삶, 인생의 가치, 그리고 행복의 문제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고민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끌벅적하지 않은 영적 수련과 번잡하지 않은 사색의 시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길이고 교회가 21세기에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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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인간 개조의 용광로에서 재탄생하다.(4)

 

군 생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포항 호미곶 마라톤대회 참가였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꼬리 끝부분부터 포항제철이 있는 그 지역이 마라톤 코스인데 42.195km를 달리기 위해서는 호미곶에서 출발하여 포항제철 찍고 유턴하여 다시 호미곶으로 오는 코스이다. 어느 날 부대 주임원사가 마라톤 대회에 참석할 장병을 소수정예로 4명 정도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 

 

당시 업무에 시달리던 나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특히 달리는 것 또는 운동하는 것 등등 몸으로 하는 것은 기피했다. 군대 가면 다들 축구했다는 말만 한다고 하는데 나는 선임들 꼬장 듣기 싫어서 축구나 그 흔한 족구도 잘 안 했다(못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잘하지만 못하는 척했다고 해두자). 그러던 나를 괴롭히던 내무실 선임은 나를 때리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자기가 운동하면 옆에서 꼭 시다를 하게 하는 것이다. 억지로 바벨(역기)를 들게 하고 체력단련을 억지로 시켰다. 

 

그래서 항상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나였는데 어느 날 내무실 최고선임(말년병장)이 나한테 의사도 묻지 않고 나 몰래 마라톤 참가신청서를 내는 바람에 타의에 의해서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심정은 정말 밖에서 만나면 죽일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4명에게는 특혜가 주어졌다. 일과 후 한 달간 마라톤 연습이었다. 힘든 연습이 왜 특혜일까? 각각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있던 부대는 감옥이나 수용소와 같았다. 우선 하드웨어적으로 철창만 없고 다 똑같다. 그리고 담벼락에 철조망이 있다. 또한 외벽에는 철통경계를 선다. 뭐 이유인즉슨 적(敵)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탈영 방지를 위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격리된 집단이 바로 군대이다. 결론적으로 밖에 나갈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다. 휴가나 훈련, 대민지원(지역의 일을 돕는 일) 등 특별한 작업을 해야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마라톤 연습을 위해서는 부대 밖에 나가서 하루에 15~20km를 달릴 수 있었다. 군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그 힘으로 매일 달리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혜는 매번은 아니지만 훈련이 끝나면 민간인 목욕탕에서 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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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주구장창 달리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달리는 것에 타고났던 나는 점점 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달리면서 배고프고,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크게 불만을 느끼지 않았고,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고 느껴졌다. 마라톤에 출전한다고 하니 담당 부사관이 아식스 마라톤화를 하나 선물로 줬고, 나는 군 생활 내내 그 신발을 신고 달릴 수 있었다. 마치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마라톤에 참가해서 42.195km를 3시간 중후반대에 완주했다. 대회가 끝나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몸무게가 하루에 5kg이 빠졌다. 몸의 회복을 위해 부대 내에 있는 회룡사라는 절에서 3박4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님들과 냉동식품(닭, 햄 등 육류 가공식품)으로 함께 식사를 하며 지냈던 날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이 짧은 인생에 있어,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그 후 부대에서 달리는 행사만 있으면 매번 불려 나가서 간부든 선임이든 함께 뛰어줘야 하는 일을 겪어야 했지만 군 생활을 하면서 교회 가는 것 외에 특별히 삶의 활력을 줬던 일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나는 이미 내가 처해 있는 곳에서 나의 삶의 방식으로 나의 길을 선택하며 적응하고 인내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힘들 때, 어렵고 괴로울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부대와 식당 중간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회를 들러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다. 군종병도 아닌 나는 군종병보다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을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삶의 방식과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경험과 인식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의 감정으로 비전을 정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내가 선택한 방향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고 나의 비전을 정해야 한다. 나에게 군 생활의 환경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재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 나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20년 뒤의 나는 그때 꿨던 꿈을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으며 정방향으로 진행 중에 있다. 

 

이렇게 나의 군 생활은 날마다 책을 읽고 군종병과 토론하고, 기도 모임을 만들어 함께 기도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2년을 넘게 군 복무를 마치고 2002년 12월 24일 예정일보다 하루 빠른 제대를 하게 되었다. 

 

군대 라떼 이야기는 누군가 끊어주지 않으면 절대 멈출 수가 없기에 여기까지만 하는 것으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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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보리여, 만약에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작은 티끌로 만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작은 티끌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작은 티끌들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작은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티끌들은 작은 티끌들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작은 티끌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삼천대천세계는 세계가 아니요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만약에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하나로 모아진 모양이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모아진 모양은 하나로 모아진 모양이 아니요 그 이름이 하나로 모아진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須菩提여,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를 碎하여 爲微塵이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기를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若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卽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何오.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이요 是名微塵衆이니이다, 世尊이시여,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는 卽非世界요 是名世界니이다. 何以故오. 若世界가 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이요 是名一合相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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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온 허깨비(幻)다. 참으로 있는 것(實有者)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니 물질계에서 보면 ‘없는 것’이다.

 

‘참으로 있는 것’은 사람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티끌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성眞性은 실유實有라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티끌은 비실유非實有라.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들이요 오직 진성만이 진실眞實이므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王日休)

 

우리가 세계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마음이다.

 

이 마음은 어떤 상으로도, 어떤 말(言語)로도 나타내질 수 없다. 나타내지면 곧 우상이요 거짓말이다.

 

깨달음을 향해 가는 자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붙잡히지(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라는 선사의 가르침에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요, 한평생 거짓말로 중생을 속였노라는 성철性徹 스님의 열반송도 이를 고백한 것이겠다.

 

상像을 보되 그것을 꿰뚫어 상 없는 상(無像之像)을 보고, 설을 듣되 그것을 타고 언어도단의 지경에 닿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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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초기에 병조판서를 지낸 윤회라는 사람이 젊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묶게 되었다. 그런데 주막의 주인은 마침 방이 없다면서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윤회는 하는 수 없이 처마 밑에 앉아 하룻밤을 지새기로 했다. 

그가 처마 밑에 앉아 있는데 주인집 딸아이가 커다란 진주 알 하나를 뜰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 곁을 지나던 오리가 그것을 먹인 줄 알고 냅다 삼켜 버렸다. 주인은 딸이 진주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윤회를 의심했다. 주인은 곧장 윤회를 묶고, 내일 아침 관가에 고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윤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주인에게 한마디만 부탁했다. “저 오리를 내 곁에 매어두시오.” 

이튿날 아침, 주인은 윤회를 관가로 끌고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윤회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말했다. “오리가 똥을 쌌는지 보시오.” 주인이 이상히 여겨 오리가 눈 똥을 헤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딸이 잃어버렸던 진주 알이 오리의 똥 속에 박혀 있었다. 깜짝 놀란 주인이 윤회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왜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소? 그랬으면 이런 봉변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윤회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말했다면 당신은 틀림 없이 오리의 배를 갈라 진주를 찾아냈을 것이 아니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맞이하는 문제에 대해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일인가를 묻고 그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한다면 더 나은 사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스스로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해 막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나는 신세대들은 무엇을 배울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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