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탄 후 제1주일 및 송년주일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우리 삶에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현장 대면예배와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3.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올해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4. 남기평 목사님이 이번 주일을 마지막으로 공덕교회 부목사로 이임하십니다.
5. 올해 재정 결산 마감을 위하여 헌금은 수요일(30일)까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6. 1월 첫째 주일(3일) 예배 후에는 당회와 구역회를 진행하겠습니다. 추후 공지를 확인해 주십시오.
7. 교우와 가정의 건강과 화목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8. 기부금영수증 필요하신 분은 신청해 주세요.
9. 1월 기도자] 함옥분(3) 안주영(10) 채보란(17) 오호숙(24) 임미화(31)
■ 다음주일(1월 3일, 성탄 후 제2주일 및 신년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방현섭 목사 / 기도 : 함옥분 장로
봉헌위원 : / 성찬보좌 : / 안내 : 정지수 집사
고마운 마음을 담아…
좋은만남교회에서 성탄절을 함께 보낸 지, 9년이 되었습니다. 9년이라는 시간, 지금 돌이켜 보면, 빨리 지나갔습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쉬운 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마음만 남는 거, 기분 탓인가요? 그만큼 좋은만남 공동체가 좋은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라는 것이고, 울림이 주는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자랑스러워 하셔도 됩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라는 것이 감리교회 내에서는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잘 모르지만, 교회의 품위를 지키는데 귀한 역할을 무겁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건, 9년이라는 시간을 뒤로 하고, 잠시 이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교회에서 사역을 하기로 결정 것 자체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성교회에서 적응할 생각과 거기서 만날 여러 벽과 문 턱들이 생각보다 단단하고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껏 저희 몸과 신앙은 좋은만남교회 방식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간 기독청년운동을 13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름의 자부심과 보람도 느꼈지만, 그 이후의 진로나 여러 상황들이 녹록치 않아 2020년은 고민이 많은 1년이었습니다. 기독운동을 하면, 일할 곳, 앞으로 미래를 고민할 곳이 거의없다는 것을 느끼는 1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목사안수를 받고, 기독운동에 몸담으면서, 돌아올 곳이 있고, 마음 편히 나의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를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저에게는 소소한 행복이었습니다.
좋은만남교회는 개인으로나 특별히 저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규현이의 첫 생일을 지냈고, 호현이의 첫 생일, 그 둘의 유아세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집을 만났습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저희 가족의 역사를 다 옆에서 지켜봐 주시고, 때로는 격려로 때로는 기도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저희 가족의 역사를 함께 겪어주신 은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으로는 5년 가까운 시간을 풋내나는 전도사를 참아주시고, 목사안수를 받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첫 설교를 한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때 그 설교를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부끄럽고, 아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간의 설교를 애정어린 시선과 마음으로 참아주시고, 나름의 본인들의 신앙의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현재 그나마 이렇게 설교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은만남교회가 없었다면 절대로 성장하지 않은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9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교인들을 배려로 참석하고, 청년 관련 일들을 실무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에큐메니칼 청년운동을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경력이 지금도 영향을 미쳐서, 그나마 나름 목사-구실을 할 수 있고, 때로는 어깨 쫙 피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성서대학 중 ‘세월호사건’이 일어났고, 그 주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좋은만남교회 공동체에게도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의 신앙살이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정립하는 큰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만남교회가 30주년을 보냈습니다. 30은 기독교인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이기도 하고, 좋은만남교회도 성숙하고 조금 더 진취적인 신앙공동체로서 부름 받는 시기로 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숙제로 좋은만남교회에 주어질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역할이 언제보다 중요할 거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여러 시련들 중에서 한국교회에 닥쳐올 엄청난 시련될 것입니다. 팬데믹을 경험한, 비대면이 권장되고, 더 나아가서 도덕 혹은 예의로 자리잡아가는 이때에 우리도 정말 고민을 해봐야 하는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좋은 인연의 끈들을 만난 것 같아, 고맙고 고맙습니다. 특별히 세 분의 목사님들, 방현섭, 박성중, 이관택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목회자 회의 때나 그리고 애정어린 충고들이 이해되고,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이 자리 빌어서, 방현섭 목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껏 표현을 잘 못했지만, 제일 존경하는 선배 그리고 목사님 중 하나입니다. 힘내십시오. 여전히 잘하고 계십니다.
좋은만남교회는 저를 때로는 목사로서, 때로는 교인으로서, 때로는 아빠로서, 때로는 30대 청년으로서, 때로는 활동가로서 대해주셨습니다. 좋은남교회는 성령의 자유뿐만 아니라 나를 나로서 바라봐주는 공동체였습니다. 9년이라는 시간, 참된 기독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행할 수 있게 그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만남교회 출신으로 부끄럽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신앙살이 하겠습니다.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 가끔 놀러 올게요.
제5화 인생의 서막에 서다.(1)
전역을 하고 나는 약 두 달간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두 달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했다.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가보았으나 배가 고파서 한 끼만 굶고 집으로 왔다.(정성이 부족했나?) 그 다음으로 경배와 찬양(하스데반)에서 하는 캠프인 ‘침묵기도’에도 참석해봤다. 정말 심심하기 짝이 없었고, 눈앞에서 막 입신入神(사전적 의미는 극히 뛰어난 경지에 들어가다)을 하기에 따라서 해 보았다. 나보다 먼저 입신한 어떤 사람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민망하여 눕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쇼도 먹히지 않았다. 뭐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 옳고 그름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이 옳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과한 행위적 신앙에 부적응자이고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는 예수전도단(YWAM)에서 겨울이면 하는 캠프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더 시험이 들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아직까지 창피하게 느꼈던 일이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소그룹을 인도하던 장신대 신학생이 있었던데 참여자들에게 “거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소그룹 안에는 목사도 한 명 있었고, 신앙생활 오래 한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다들 그럴듯한 이야기들로 ‘거룩’이라는 단어를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하는 답들은 ‘구별’이라는 단어로 종합되었다. 순서는 돌고 돌아 내 차례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솔직히 거룩이 뭔지 몰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나도 질문을 해 본다면 “거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서 이 질문을 던진 그 소그룹 리더의 의도를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 성탄절 때 항상 흘러나오는 찬송가(캐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떠오르면서 그 노래와 함께 배경이 되었던 캄캄한 밤에 불빛 하나 켜져 있던 교회가 떠올랐고, 답하기를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불빛이 하나가 들어와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격지심일지 모르겠지만 못 배운 티를 너무 낸 것 같아서 계속 배운척을 하며 설명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뭘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난 이미지를 설명하면서 뭔가 그럴듯하게 말하고 싶었는지, 되지도 않는 표현을 써가며 설명을 해 됐다. 왠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나에게 ‘거룩’이란 정말 그런 것이었다.
그랬다. 당시 모든 것이 적응되지 않던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이 질문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나를 창피하게 했던 그 질문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찬양의 시간도 아니었고, 굶고 기도하는 굴속도 아니었다. 뭔가 신령한척 하는, 아니 신령한 제스쳐(gesture)도 아니었다.
“거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권면하길 우리는 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면 좋겠다. 내가 찾았던 답은 ‘거룩’이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거룩은 삶의 화려한 것으로 치장될 필요도 없다. 거룩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삶의 반영이다. 앞이 막막했던 나에게 거룩은 그러했다. 어두운 곳에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것, 세상이 전부 어두워도 나는 빛으로 남아 사는 것, 그렇게 나에게 주어졌던 질문의 답이 정리가 될 즈음, 나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 또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기로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무엇이든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앞으로 계속 글로 이야기하겠지만 난 내가 생각하는 거룩을 향해 물불 가리지 않고 살아갔다. 비록 한참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너무 멀리 와 있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가끔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만큼 살아갈 삶을 위해 나는 인내하고 끊임없이 걷고 걸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대학과 대학원 적어도 쉬지 않고 달려도 7년은 가야 하는 힘든 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서대문에 있는 ‘서울학원’에 단과반을 끊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고 낮에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후 특별히 학력도, 능력도 없던 나에게 체력은 있었다. 그래서 일용직 근로자(노가다)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공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던 중에 출퇴근 시간이 분명하고, 꽤 안정적이며, 월급도 괜찮은 일을 찾기로 했다.
어느 날 친형이 나를 불렀다. 나에게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 주었다. 형은 이미 몇 년 전에 해봤던 일로 업체까지 소개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형의 말을 듣고 을지로4가에 있는 하나은행의 자회사쯤 되는 용역회사에 가서 1차 면접을 보고 하나은행 본사에 가서 2차 면접을 봤다. 본사에서의 면접은 경쟁이 치열했다. 1~2명 뽑는데 2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총 3명이 뽑혔고, 하나은행 북가좌지점으로 3차 면접을 보러 갔다. 함께 가신 분들의 이력은 뭐 나같이 사회 초년생하고는 쨉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젊음이 있었다. 내가 제일 어렸기에 다루기가 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3명의 면접자 중에 최종 1인이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을 시작되었다.
32
수보리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에 가득 찬 일곱 가지 보물을 가지고 써서 널리 베푼다 해도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로서 보리심을 낸 자가 이 경經이나 사구게四句偈를 몸에 지니고 소리 내어 읽으며 남을 위해여 풀어서 말해 준다면 그 복이 앞 사람 복보다 크다.
須菩提여, 若有人이 以萬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으로 發若提心者가 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하여 受持讀誦하고 爲人演說하면 基福이 勝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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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아승지세계無量阿僧祗世界는 앞에서 말한 항하사세계恒河沙世界와 같은 말이다. 무량無量이니 무수無數니 하고 말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양量이요 수數다. 언젠가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깨닮음의 세계(佛界)는 공空의 세계다. 유일한 실재인 ‘마음’의 세계다.
이 두 세계는 양과 질로 견주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있음’과 ‘없음’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앞 사람의 복은 세간복世間福이라서 마침내 때가 되면 바닥이 난다. 하물며 받은 복으로 다시 악을 짓는다면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나중 사람의 복은 출세간복出世間福이라서 그 복이 바닥나지 않고 다만 더욱 자랄 따름이요 복을 받아 그것으로 악을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중 사람의 복이 앞 사람의 무량무수無量無數를 이긴다고 했다.”(王日休)
“욕심낼 만한 것을 보지 않아서(보이지 않아서) 그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은 소승의 힘이요, 욕심낼 만한 것을 보아도(보여도) 그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은 대승의 힘이다.”(老子)
온 세상이 다 없어져도 하느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했다.
어떤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담임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 중에 졸고있는 성도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호통을 쳐서 깨우자니 시험에 들 것 같고 무시하고 계속 설교를 하자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설교도 잘 해야지, 조는 사람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지, 머리가 복잡해서 설교에 집중이 잘 안 되었다.
담임 목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 눈을 감고 있는 성도님들이 몇 분 계시는데 그분들은 결코 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러 가신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면 꼭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이 때 휴대전화 소리가 교인석에서 크게 울렸다. 목사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받아 보세요. 주님께서 벌써 응답을 주셨나 봅니다.”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여인은 어미의 심정을 모릅니다.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어른 또한 부모의 심정을 모릅니다. 상처로 인해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하고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 것인 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가난해서 굶어 보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 한번도 사회적 약자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알 수 없습니다. 공감적 이해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대상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 대상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공감적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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