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성서본문 ; 레위기 11:44-45
44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몸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땅에 기어 다니는 어떤 길짐승 때문에, 너희가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45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들어가며 : 요즘 제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사실을 벅차서 교회 일도 제대로 못보고 교우들도 제대로 못 챙긴다는 자책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으니 저도 참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 할 당위성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모여 북한 어린이들에게 우유 보내는 운동을 하는 단체를 창립하였습니다. 기업의 후원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협약식을 맺어 직원들이 월 1만원 회원에 가입하여 우유를 보내는 국민적 운동을 목표로 창립된 단체로 ‘함께 나누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올 연말까지 1만 원 회원을 1만 명, 매월 1억 원씩을 모아 내년부터 매주 한 차례씩 북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동안 해마다 평화통일기원주일도 정해서 지키고 이 겨레에게 있어 통일문제가 시급하다고 고백하며 기도하였는데 사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배 목사님이 사무총장을 맡아서 도와달라고 하기에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일을 돕겠습니까마는 이 일을 신앙적 고백으로 감당하고자 합니다. 지금 남북 어린이의 신장이 16Cm 차이난다고 합니다. 몸무게도 15Kg 가량 차이가 난답니다. 어린 시절에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해서 육체적인 문제는 물론 정신적인 문제도 발생한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통일이 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십여 년 동안 300만 명이 아사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영유아라고 하니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도무지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떻습니까?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신앙은 연민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연민은 값싼 동정이라기보다는 이웃이 당한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이해하고 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정부의 정책이 대부분 부자들을 더욱 배불리고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정책들이라 심기가 불편합니다만 그래서인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는 서민들이 더욱 서로를 챙기고 돌보려는 마음이 커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도 물론 힘들지만 힘겨운 삶, 고단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작은 손이나마 내밀 수 있는 우리 좋은만남교회, 좋은만남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오늘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옛날에 오누이를 둔 떡장수 아누머니가 있었습니다. 장에 나가 떡을 파는데 오늘은 장사가 잘 되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깜깜한 밤에 산을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밤길을 걷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어흥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다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아주머니까지 잡아먹은 호랑이가 아주머니 옷을 입고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고 갔는데 아이들이 하늘에 기도하니까 굵은 동아줄이 내려와서 아이들은 살고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이 내려와서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오누이는 하늘에 올라가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이야기 제목이‘해와 달이 된 오누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해와 달을 보면서 참 느낌이 달라지더라고요. 정말로 그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이니까요.
좀 커서는 추석에 보름달을 보고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는 목사 아들들인 사촌들과 예배당 높은 곳에 올라가 보름달에게 ‘달님, 달님’ 하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어른들에게 알려져서 엄청 욕을 먹었지요. 목사 망신 자식들이 다 시킨다고요. 아무튼 그때는 그런 것을 순진하게 믿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커보니 그건 옛날 이야기일뿐이고 신화 혹은 설화, 민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인생 꺾어진 나이가 되어서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게 되니 우리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여전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은 베델성서연구 책자에 나오는 그림인데 어린 나이에 이 그림을 보고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록 얼굴은 안 보이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 하늘 위에서 구름에 가려 지구를 품고 혹은 들고 있다고 여겼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혹시 하늘에 계신 어떤 나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사신 어떤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이지만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믿는 수준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늘에, 혹은 어떤 알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공간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많이 싸웠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걸로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좀 유식하게 표현해서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믿고 자시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존재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우리의 믿음을 있고 없고의 낮은 수준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입니다. 계시고 아니고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지 살지 않는지가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거룩하라는 명령을 하신 후에 땅에 기어 다니는 길짐승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부정한 짐승을 거론하면 그것을 거룩함과 연관짓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기어 다니는 짐승을 딱 짚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거룩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기어 다니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였을까요? 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벌벌 기다는 단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비굴함에 가득찬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는 이 경고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야 하는 존재, 창세기 1,26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써 당당하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는데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면서 땅을 기고 배로 기어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 조건과 여건에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비겁하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기어 다니는 짐승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벌벌 기어 다닙니다. 또 부도덕한 신성모독의 권력들이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야 할 사람들을 공포와 폭압과 협박으로 벌벌 기게 만듭니다. 이런 상태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당당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비굴하게 만들거나 그 어떤 힘도 나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부끄럽지 않게 신적인 품위를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마주선 엘리야, 골리앗 앞에선 다윗, 십자가 위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품위였고 믿음입니다. 여기에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사는 것까지 한다면 더욱 좋습니다.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해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며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면서 싸우는 유치한 어린 시절의 치기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지만 그것이 신화적인 믿음이 돼버리면 안 믿으니만도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도 못하지만 또 거룩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음에 따라 살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삶을 변화시킬 힘과 능력이 없는 신이라면 그것은 신도 아니도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서본문 ; 레위기 11:44-45
44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몸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땅에 기어 다니는 어떤 길짐승 때문에, 너희가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45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들어가며 : 요즘 제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사실을 벅차서 교회 일도 제대로 못보고 교우들도 제대로 못 챙긴다는 자책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으니 저도 참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 할 당위성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모여 북한 어린이들에게 우유 보내는 운동을 하는 단체를 창립하였습니다. 기업의 후원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협약식을 맺어 직원들이 월 1만원 회원에 가입하여 우유를 보내는 국민적 운동을 목표로 창립된 단체로 ‘함께 나누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올 연말까지 1만 원 회원을 1만 명, 매월 1억 원씩을 모아 내년부터 매주 한 차례씩 북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동안 해마다 평화통일기원주일도 정해서 지키고 이 겨레에게 있어 통일문제가 시급하다고 고백하며 기도하였는데 사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배 목사님이 사무총장을 맡아서 도와달라고 하기에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일을 돕겠습니까마는 이 일을 신앙적 고백으로 감당하고자 합니다. 지금 남북 어린이의 신장이 16Cm 차이난다고 합니다. 몸무게도 15Kg 가량 차이가 난답니다. 어린 시절에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해서 육체적인 문제는 물론 정신적인 문제도 발생한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통일이 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십여 년 동안 300만 명이 아사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영유아라고 하니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도무지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떻습니까?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신앙은 연민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연민은 값싼 동정이라기보다는 이웃이 당한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이해하고 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정부의 정책이 대부분 부자들을 더욱 배불리고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정책들이라 심기가 불편합니다만 그래서인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는 서민들이 더욱 서로를 챙기고 돌보려는 마음이 커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도 물론 힘들지만 힘겨운 삶, 고단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작은 손이나마 내밀 수 있는 우리 좋은만남교회, 좋은만남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오늘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옛날에 오누이를 둔 떡장수 아누머니가 있었습니다. 장에 나가 떡을 파는데 오늘은 장사가 잘 되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깜깜한 밤에 산을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밤길을 걷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어흥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다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아주머니까지 잡아먹은 호랑이가 아주머니 옷을 입고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고 갔는데 아이들이 하늘에 기도하니까 굵은 동아줄이 내려와서 아이들은 살고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이 내려와서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오누이는 하늘에 올라가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이야기 제목이‘해와 달이 된 오누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해와 달을 보면서 참 느낌이 달라지더라고요. 정말로 그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이니까요.
좀 커서는 추석에 보름달을 보고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는 목사 아들들인 사촌들과 예배당 높은 곳에 올라가 보름달에게 ‘달님, 달님’ 하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어른들에게 알려져서 엄청 욕을 먹었지요. 목사 망신 자식들이 다 시킨다고요. 아무튼 그때는 그런 것을 순진하게 믿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커보니 그건 옛날 이야기일뿐이고 신화 혹은 설화, 민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인생 꺾어진 나이가 되어서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게 되니 우리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여전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은 베델성서연구 책자에 나오는 그림인데 어린 나이에 이 그림을 보고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록 얼굴은 안 보이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 하늘 위에서 구름에 가려 지구를 품고 혹은 들고 있다고 여겼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혹시 하늘에 계신 어떤 나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사신 어떤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이지만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믿는 수준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늘에, 혹은 어떤 알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공간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많이 싸웠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걸로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좀 유식하게 표현해서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믿고 자시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존재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우리의 믿음을 있고 없고의 낮은 수준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입니다. 계시고 아니고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지 살지 않는지가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거룩하라는 명령을 하신 후에 땅에 기어 다니는 길짐승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부정한 짐승을 거론하면 그것을 거룩함과 연관짓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기어 다니는 짐승을 딱 짚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거룩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기어 다니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였을까요? 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벌벌 기다는 단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비굴함에 가득찬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는 이 경고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야 하는 존재, 창세기 1,26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써 당당하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는데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면서 땅을 기고 배로 기어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 조건과 여건에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비겁하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기어 다니는 짐승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비굴하게 만들고 벌벌 기어 다닙니다. 또 부도덕한 신성모독의 권력들이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야 할 사람들을 공포와 폭압과 협박으로 벌벌 기게 만듭니다. 이런 상태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당당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비굴하게 만들거나 그 어떤 힘도 나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부끄럽지 않게 신적인 품위를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마주선 엘리야, 골리앗 앞에선 다윗, 십자가 위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품위였고 믿음입니다. 여기에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사는 것까지 한다면 더욱 좋습니다.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해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며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면서 싸우는 유치한 어린 시절의 치기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지만 그것이 신화적인 믿음이 돼버리면 안 믿으니만도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도 못하지만 또 거룩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음에 따라 살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삶을 변화시킬 힘과 능력이 없는 신이라면 그것은 신도 아니도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