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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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름다운 동행

성서본문 ; 마태복음 27:50-56
50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51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53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55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56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들어가며 : 농촌은 이제 가을걷이가 다 끝나서 논은 그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고 김장용 채소들도 시장으로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올해 농사는 다 끝났다고 할 수 있겠죠. 한 해 농사를 다 마친 농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올해는 특히 대풍년이라 벼농사도 잘 되었고 과수농사도 잘 되었답니다만 농부들 마음은 편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추곡수매가 반영을 요구하면서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그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착찹합니다. 농사가 잘 돼도 걱정, 안 돼도 걱정이니 감사할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도 다음주일이면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우리 마음은 기쁨이 넘치는지 시름이 깊어지는지 곰곰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일이 너무 많았다고, 수입이 생각보다 적었다고, 나누기가 아까운 마음 등등으로 정작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은 추수감사주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소유의 다소가 감사의 조건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의 여유요, 생명을 이어주시는 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믿음 없이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우리는 살면서 많은 동행자를 만납니다. 여행을 하거나 일을 진행할 때, 혹은 인생 전체의 동행자까지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동행도 아름다운 동행이 있는가 하면 추한 동행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인가에 보면 여행길에 나선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은 금방 친해져서 오래된 친구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곰을 보고 한 사람은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버렸고 남겨진 한 사람은 당황하다가 죽은 척을 하고 엎드렸습니다. 다행히 곰이 그냥 냄새만 맡고 지나가버리자 나무 위에 있던 사람이 내려와서 죽은 척 했던 사람에게 묻습니다. ‘아까 보니 곰이 자네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던데 뭐라고 하던가?’ 그러자 그 사람은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그런 사람과는 동행하지 말라고 하더군’ 하면서 외면하였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동행을 만나야하겠지만 또 한편 우리도 타인에게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동행이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잠깐 언급합니다. 그런데 그 명단을 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님의 최측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여자들만 언급이 되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성 제자들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몇몇 여인의 이름은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밖이지만 성서는 이 여인들의 동행을 아름다운 동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동행은 어떤 동행인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름다운 동행은 무엇보다도 함께 고난을 나누는 동행입니다. 그동안 숱한 여정의 기억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뜻밖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길, 죽음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렇게 큰소리쳤던 제자들, 예수님의 측근에서 가장 많은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동행자를 자처하였지만 가장 위급한 순간에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고 한 자리 차지할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있었을 때 함께 하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운, 죽음의 길, 고난의 길에 함께 한 동행이야말로 아름다운 동행임을 성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인지 아닌지는 어려운 일을 함께 겪어봐야 안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신앙에서의 아름다운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신 곳은 왕궁도 아니었고 고관대작의 고래등같은 집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땅 갈릴리였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세상의 가장 어려운 곳, 밑바닥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고난과 고생에 참여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신앙적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 남아있던 이들이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미천하고 연약한 여인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강자, 가진 자가 그 자리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강자, 가진 자가 만약 그 자리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예수님을 못박기 위한 자리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어업으로 단련된 건장한 구릿빛 근육을 가진 남자들인 제자들도 줄행랑을 놓은 자리였지만 연약한 여인들, 아줌마들은 끝끝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가장 약한 존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약하고 여린 존재, 그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묵묵히 끌려가는 약자였습니다. 결국 가장 약한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스스로가 가장 약한 사람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우리는 결코 아름답게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고난의 동행이 아니라 영광과 축복의 동행자가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라고 빌고 있습니다. 또한 약자가 되기보다는 강자, 군림하는 자, 많은 것을 소유하고 큰 권력을 소유하여 휘두르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과 야합하고 고난의 현실을 비웃으며 가난한 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모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직시하고 말씀에서 생명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가능성을 발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동행은 말없이 섬기는 동행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13명입니다. 종종 예수님 주위에 모이는 제자들은 70명, 120명, 많을 때는 500명도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이 최소한 1년 이상, 길게는 3년 동안 거리를 떠돌면서도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이 매번 식사 때마다 돌덩어리를 빵으로 만들고 전갈을 생선으로 만드시는 기적을 베푸셨을까요? 매번 식당에서 사 드셨을까요?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 예수님 공생애 시작점인 갈릴리에서부터 함께 했던 여인들에 대한 언급이 이 의문을 푸는 단서가 됩니다. 후원자나 자금 지원책도 있었겠지만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음식을 공급하고 식사를 마련했으며 주머니 쌈지돈을 털어 섬겼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이 여인들의 봉사가 제대로 언급된 부분은 없습니다. 후에 사도시대로 넘어가면 이런 언급이 나오지만 복음서에는 거의 없습니다.

여인들의 섬김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칭찬도 없으며 자랑 또한 없는 그런 섬김이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수족이 되고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섬김이었습니다. 그런 섬김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여정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아름다운 동행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부분에서도 별로 아름다운 동행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작은 일을 하나 해도 큰 소문을 해고 교회 홍보와 선전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마을 청소를 해도 ‘OO교회’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합니다. 요즘은 어깨띠가 아니라 아예 ‘OO교회’라고 인쇄된 조끼를 맞춰 입고 드러내놓고 봉사를 합니다. 마치 정치인들이나 관공서가 무슨 전시행정을 하듯 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선한 섬김 자체로 감사하기보다는 선교, 전도라는 도구로 섬김을 전락시켰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부끄러운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엉터리 섬김으로는 결코 예수님과는 물론이고 이 시대와도 아름다운 동행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가며 : 아름다운 신앙은 아름다운 동행의 신앙입니다. 그 동행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동행이고 이웃과의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존재로 가장 큰 고난을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 함께 서 있는 것, 함께 바라보고 함께 분노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신앙의 동행임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가진 것으로 드러나지 않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고 따르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동행의 조건임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선택하는 결단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아름다운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 진리의 인도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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