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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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을 믿는 기쁨

본문 : 갈라디아서 1:9-10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들어가며 :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최후의 5분… 절체절명의 시간이 초초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 이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순간 상념에 젖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2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세월을 금쪽같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그 때부터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날마다 시간을 5분 단위로 계산하여 살았고, 마지막 삶의 5분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죄와 벌》,《까라마조프의 형제들》,《영원한 만남》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공상적 사회주의 연구 서클인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라는 데에 참여했다가 28세 되던 1849년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이 러시아에 들어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당국에서는 시범 케이스를 하나 선정해 엄벌을 내리면 젊은이들이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껏 팜플렛이나 돌려읽던 독서토론회 멤버에게 중형이 내려졌는데,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4년간의 중노동과 5년간의 군복무로 감형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각색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마음이 바로 종말론적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 인생을 귀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어버이의 지혜와 구세주 예수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지난주간에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예수목회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목회세미나는 ‘예수의 길을 가는 기쁨’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주제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기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기에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중요합니다. 재미가 있고 즐거움, 기쁨이 있으면 사람들이 아낌 없이 지갑을 열고 시간을 투자합니다. 힘겹고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이다 보니 문득문득 만나는 작은 기쁨들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동호회에 기꺼이 참여합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등산복과 배낭, 스틱을 사서 산에 오르고 마치 경주 선수라도 된 듯이 오토바이에 라이딩 자켓, 부츠를 사 입고는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가끔 주일에 야외예배나 농활 등을 가게 되는데 오가는 길에 보면 짚차나 오토바이가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만약 교회에 다니지 않았거나 목사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들 중에 끼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아쉬워합니다. 그렇다고 목사들끼리 저런 모임을 만들어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참 대단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무슨 크고 작은 재미가 있고 무슨 신나는 기쁨이 있다고 들로 산으로 나서는 종류의 즐거움을 마다하고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당에 나가 한 시간 이상씩 지겨운 설교-제가 하는 설교도 혹시 지겨우신가요?-를 듣고 앉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에는 어떤 기쁨이 있어서 여러분들은 매주일 빠지지 않고 이 자리로 모여드는가요? 적어도 예배 후에 맛있는 점심식사의 기쁨은 자신 있지만 그 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꼬박고박 천 원이고 이천 원이고, 만 원이고 십만 원이고 주일헌금이다, 십일조에 감사헌금이다, 게다가 겨자씨헌금에 NGO 후원까지 갖다 바치니 무슨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왜 꼬박꼬박 교회에 오십니까? 교회가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신앙의 기쁨, 예수를 믿는 기쁨, 교회에 나오는 기쁨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습관에 가까웠습니다. 나고 자라면서 교회라는 곳에 왔다갔다하고 그 안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생활이 맞춰지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죽음을 두려워하고 내세에 대한 걱정을 할 것도 아니다보니 순전히 교회생활이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이지요. 매일 사회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갈 때 집에 가면 무슨무슨 즐거움이 있고 기쁜 일이 있어서 집에 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저 주일이면 교회에 나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 말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힘듭니다. 힘이 드는 것을 억지로 하다보면 뛰쳐나갈 기회만 옅보게 되지요. 아니면 화난 사람처럼 싸움을 걸어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넘어갑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고 많은 목사들이 설교하지만 정말 기쁨이 넘치는 것인지, 아니면 별로 기쁜 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니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기쁜 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기쁨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살전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듯이 기독교인으로서 기뻐야 하는 것은 알지만 딱히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말할만한 구체적인 기쁨은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기쁨도 없이 이 지겹고 무미건조한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기쁨보다는 오히려 부담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연인 간의 사랑의 감정이 기쁨을 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소유에 관한 우리의 생각 때문인데 무엇인가를 얻고 성취하고 승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혹은 육체적인 자극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육신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이 말할 수 없는 쾌락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니코틴, 알콜, 마약 중독이며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또 인간 내부에서 벌어지는 호르몬의 화학작용과도 관련이 있지요. 요즘 들어 도박중독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도박하며 돈을 딸 때 발생하는 도파민 호르몬이 중독성 호르몬이라고 하는데 이 도파민은 연인 사이의 사랑에도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물론 기쁜 일일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한 기쁨을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예수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때 느끼는 자부심도 피학적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해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목이 쉬도록 찬송을 하고 방언을 하는 것도 일종의 화학적 반응을 유도하여 기쁨을 얻게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들만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 믿고 누리는 기쁨이 이런 것들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기쁨의 근거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기쁨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기쁨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쁨의 기준이나 종류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기쁨을 맛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기쁨을 제대로 맛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65%가 위로와 위안, 성공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여전히 육체적, 물리적, 화학적 기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우리가 사람 중심의 기쁨에 머물러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기쁨이 열쇠입니다.
4%도 안 되는 기독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답하였습니다. 참 어렵고 멋진 말이지만 그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고 고백한다면 이런저런 물질적, 물리적, 화학적 기쁨을 더 좋아하실까, 자녀들이 참된 삶, 거짓 없는 진실 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실까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참된 사람됨을 이루고 참다운 인생을 사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발견할 기회를 얻었고 또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기쁨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 삶을 통해 보여주셨고 사도 바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중심의 이 기쁨을 통해 우리 삶이 더욱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나가며 : 얄팍한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 기쁨을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품위를 누리며 참된 삶을 꾸려가는 즐거움은 우리가 별로 누려보지 못하였기에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십시오.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육신은 늙어지고 마음은 변덕이 심합니다. 사람은 떠나가고 중독은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변치 않는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때 우리는 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 기쁨을 추구하시면서 살아가십시오. 참된 삶을 누리는 기쁨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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