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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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일 왕국절 제7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이 작은 사람들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18:10-14

10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1절 없음)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해답이 되십니다. 믿으십니까? 미국 남부에는 바이블벨트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인데, 이 지역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영어로 예수님이 곧 오신다 그대는 준비되어 있는가?” “예수천당 불신지옥등의 문구들이 써 있다고 합니다. 참 신앙적인 동네인 것 같습니다. 원색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러다 눈에 확 띄는 문구가 보였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해답이십니다라는 글귀입니다. 다른 문구들은 몰라도 이 말은 참 마음에 듭니다. “예수님께서 해답이십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빨간색 락카로 엄청나게 큰 낙서가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질문이 뭐냐?”

우리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가 답이라고! 예수 밖에 없다고! 그럼 도대체 질문이 무엇입니까? 정녕 예수가 답이라고 말한다면 그 질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마도 그질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십니까?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해답을 기다리십니까? 어떤 질문을 가지고,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인간은 모든 생명 중에 유일하게 질문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멕시코 신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의 조상은 옥수수신이랍니다. 옥수수신들은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 신들은 질문을 해야만 앞으로 한발짝씩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질문하면서 걷고 걸으면서 질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질문하면서 지상에서 적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신화는 이야기합니다. 질문의 크기가 바로 우리 삶의 크기다. 질문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넓어지고, 진보되며, 성숙할 수 있다. 저는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질문의 크기가 바로 우리 신앙의 크기입니다.

맹목적으로 믿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삶의 문제들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맡기고, 질문하고, 또 그 대답을 경청하는 삶이야말로, 앞으로 한발자국 나아가는 삶, 즉 진보하고, 성숙하고, 성장하는 신앙을 저와 여러분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수가 해답이지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질문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인사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질문이 궁금합니다.”

 

박순용 집사님! 이 앞에 전태일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말하기 방식은 참 듣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십니다.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질문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특기인 듯 보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지금 한창 당시의 소외된 누군가를 놓고 토론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의 문맥을 보면 이 작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건데, 그런 소외된 이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예수님께서 갑자기 하늘의 천사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당혹스러운 질문이시죠. 땅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하늘의 이야기를 접목시키시니까요. 뭥미. 멘붕. 대략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세월의 흔적들이 이 한권에 담겨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필하였고,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름이 많이 생겼습니다. 생략되고, 축약되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것은 그 주름진 성서를 펼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또 기도해서 그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갑논을박 하고 있는 이 작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한번 말씀해 보시겠어요?

우리도 이 작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전태일열사 42주기를 맞이해서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 직접 다녀오신분들도 있지요. 오늘날 우리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벌써 23명이나 희생된 엄청난 사건아닙니까?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까 독거노인들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시대의 아픔, 시대의 상처를 그저 이야깃거리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와 연결시키시고 계십니다. 성서를 보면 11절 말씀이 없습니다. 아마도 한 제자가 갑자기 세상 일 이야기하다가 웬 하나님 얘기시냐며 예수님께 질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비유를 하나 소개하시며서 대답을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100마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양을 치는 목자이겠지요. 당시 유대인이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이 목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웃집 회사원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목자가 100마리 양을 이끌고 가는데, 가만 보니 한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목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그 양 1마리를 버리고 남아있는 99마리 양이라도 챙겨야 할까요? 1 vs 99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유목생활을 해왔던 유대인들에게 양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고민할 부분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양의 습성 그리고 오랜 경험을 통해 잃은 양 1마리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절에서도 예수님께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게 당연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지요? 목자는 100마리나 되는 양 중에 1마리가 없어진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 비유에서 목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우리가 양이지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잃은 양인 나를 찾으시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1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까? 예수님이시니까. 내가 잘못을 하고, 또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으면 예수님께서 세상 열일을 제쳐 놓고라도 나를 찾아오실 거야. 예수님이니까. 뭐 이런 답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니가 목자라면 어떻게 하겠느냐?입니다. 우리가 양이 아니라, 우리는 목자입니다. 이미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잃어버리고도 양 잃어버린 것조차 모르면 그것이 목자냐? 이게 이미 전제입니다. 예전에 한집에 얘들이 7~8명씩 되었을 때가 있습니다. 어디 갈 때 엄마가 꼭 얘들을 세어봐야 압니까? 엄마면 그냥 알아지는 것이죠. 그러다가 얘라도 잃어버리면 그것이 엄마냐!고 비난받게 되는 겁니다. 예전에 중랑구 토마토학교에서 나들이 갔다가 아이 한명이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그 때 담당 짝꿍선생님이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 아이가 없어진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라구요. 그 아이가 없어진 사실을 저랑 프로그램 짜는 선생님이 발견하였습니다. 난리가 났었죠. 결국 다행히 찾긴 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다 선생님입니까? 목자라고 다 목자입니까? 신앙인이라고 다 신앙인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목자는 그나마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는 목자입니다. 그 양이 지금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가고 있을지, 사나운 산짐승을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걱정하고, 염려해서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목자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기 갈 길 바빠서 양이야 없어지든 말든 앞만 보고 가는 목자는 예수님의 예화에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우리 자신을 많이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인인가? 얼마나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목장을 맡겨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양으로 맡겨주셨습니다. 나는 과연 내 삶에서 진짜 신실한 목자인가? 아닌가? 우리는 과연 진짜 신앙인입니까? 아닙니까?

목자가 일단 잃은 양을 찾기로 했습니다.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과연 찾을 수 있기나 한 걸까?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양을 찾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막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결단했는데, 이거 참 막막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요. 13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더욱 큰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잃은 양을 찾는 것! 이 작은 자들을 찾는 일은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은 양을 더 많이 갖는 것이 복되다고 얘기하지만, 우리 기독교 신앙은 잃은 양을 찾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속에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이 작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아니 꼭 사람일 필요는 없지요. 무엇입니까?

 

그런데 왜 잃은 양을 찾는 것이 더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고생해서 찾은 양이니까요? 수고의 성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자세히 이야기하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은 단지 그 잃은 양 한 마리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 100마리를 전부 구원하는 일입니다. 1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목자가 그 양을 버리고 그냥 간다면 나머지 99마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 나도 버려질 수 있구나. 나는 이 무리에서 절대 이탈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어떻게든 이탈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좁은 길을 지날 때는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고, 다른 양의 머리를 밟고, 서로를 밀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날 것입니다. 가는 길 자체가 지옥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 1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목자가 목숨 걸고 그 양을 지키러 간다면 어떨까요? 다른 양들도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가는 길이 두렵지 않습니다. 천국과 같은 기쁨의 길이 되지 않겠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모든 양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요새 제가 좀 외롭습니다. 지난 주 2개의 모임이 있었는데, 몸이 안 좋고, 너무 밤늦은 약속인지라 연락도 안하고, 불참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오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문자한통 안 오는 것입니다. 약간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정도로도 사람은 무관심에 나약해집니다.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로 23명이라는 생떼같은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몇 명이 더 희생될지 모릅니다. 더 이상의 죽음은 없어야 한다고 김정우 지부장은 오늘로서 40일 째 곡끼를 끊었습니다. 목숨을 건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정부도, 쌍용자동차 사측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도 무섭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더 이상 사회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그냥 이 작은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과 하늘의 일과 연결된 일이지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은 절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삶이 죽을 만큼 힘들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고 상담을 하면 가장 깊은 상처 하나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합니다. 내 삶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한 부분에 대해 질문하시고, 또 보듬어 안으시고, 감싸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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