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일 강림절 제1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골든타임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21:3-7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제가 최근에 푹 빠져 살았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상황을 다룬 의학드라마 ‘골든타임’입니다. 드라마의 주 공간이 대학병원 응급실이기 때문에 위급한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환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피가 터지고, 울음이 터지는 상황이 계속 반복됩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최인혁이라는 심지 곧은 의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타협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관심하는 것은 환자의 생명입니다. 이 병원에 인턴으로 지원한 드라마의 주인공 이민호는 면접자리에서 최인혁에게 질문을 하나 받습니다.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인턴 이민호는 드라마가 종영하는 내내 이 질문과 대면합니다.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저는 이 질문이 다른 누가 아니라 저에게 하는 질문이라 여겨집니다. “전도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신앙인은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의사를 10년 이상 했던 최인혁이 이제 막 의사를 시작하려는 인턴에게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엔 대부분의 의사들이 환자를 만나는 것이 두렵고 환자가 자기 앞에서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환자의 생명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달라집니다. 자신의 위치, 먹고사는 문제, 진급의 문제, 의료체계와 시스템에 따른 무력함 들이 더욱 두려워지는 겁니다.
신앙인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거, 하나님의 바램과 정반대로 살까봐 하루하루 조심조심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나의 욕심과 나의 자랑은 두 번째 세 번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몇몇 다른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본업이 고기잡이를 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상당히 두렵습니다. 예전과 같이 그물질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주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송했던 스승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날 이들은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누었던 꿈도 이상도 하나님의 나라도 모조리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처음에 그들은 로마병사들이 두려웠을 겁니다. 스승을 죽이고 자기들마저 죽이고 싶어 했던 종교지도자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고 있는데. 아침이 되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고 있는 상황에 대해 두려웠을 것입니다. 두려워 미칠 것 같은 세상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지만 이 순간 베드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베드로는 아마도 내면 깊숙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배신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울 것입니다. 그토록 워하고 따랐던 예수님과의 관계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상황.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가장 두려웠던 것입니다.
‘골든타임’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은 바로 사고가 난 후 적절한 응급치료를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 한 시간을 뜻합니다. 참 아이러니 한 단어입니다. 사고가 나서 이제 곧 죽네사네 하는 사람, 피가 낭자되어 베트랑 의사들도 어쩔 줄 모르는 환자에게 주어진 1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르니 말입니다. 여하튼 응급실에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인 한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릅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는 4절에 나온 것 같이 “이미 동틀 무렵”을 골든타임으로 맞이합니다. 이미 동틀 무렵이라는 시간으로 우리는 베드로가 밤을 새도록 그물질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상 고기잡이는 밤에 하기 때문에 동이 터 온다는 것은 이제 일 할 수 있는 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손에는 잡은 물고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갔던 예수님을 돌아가시고, 그 스승을 배신하고 다시 잡은 그물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밤새 어둠 속을 헤매면서 뭔가 되겠지하던 막연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절망의 시간, 하지만 우리는 이 절망의 시간이 베드로에게 다시 삶의 이유를 던지는 골든타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어스름한 절망이 팽배한 시간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는 바다로 뛰어들기 까지 합니다. 우리는 물위를 걷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가 얼마나 바다를 무서워했던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골든타임’이란 시간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골든타임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절망 가운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는 공허함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가릅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이 죽음의 순간에 생명의 손을 사랑의 손을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절망이더라도 골든타임입니다.
두 번째는 ‘살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골든타임은 이미 죽음 목숨이지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합니다. 결국 나를 구원하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죽음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는, 나를 살아있게 해주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골든타임은 나를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동틀 무렵, 자기 자신이 이제 완전히 절망하여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그 때 골든타임을 맞이합니다. 먼저 죽음의 기운이 짙게 깔리던 그 때, 누군가의 음성을 예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또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이전의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다음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절하게 떡과 생선을 숯불에 구워주시는데, 그 따뜻한 만남은 바로 지난 밤부터 새벽까지의 골든타임을 이겨낸 제자들에게 주시는 상이십니다.
이제 시간적으로만 통이 튼 것이 아닙니다. 어둠과 절망의 상처 가운데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삶에도 해가 떠오르고 있는 순간입니다.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강림절 또는 대림절로도 불립니다. 다른 말로 기다림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아기 예수를 기다립니다. 저는 이 기다림의 절기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정한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이 터오는 나룻배 위에서 고심하고 두려워하던 베드로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고기였을까요?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전 베드로가 물고기를 기다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린 것 아닙니다. 맨발로 바닷물 속에 뛰어들 만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기다린 것 아닙니까? 죽음이 삶으로 바뀌는 시간 골든타임, 이 기다림의 절기에 우리 모두가 골든타임을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철탑 위에 올라가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들 만큼 절실한 것이 있습니까? 아기 예수가 오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에 이뤄지기를 그토록 바라고 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피눈물 흘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시편 137편을 보면 복수의 기도가 잇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 이들의 기도가 눈물 겹습니다. 이들은 몸부림치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중한가?”
아기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대답입니다. “너희는 내게 소중하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절망속에 있는 이들에게 이 기다림의 절기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합니다. 이번 강림절기는 연례 행사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변화되는 소중한 기다림이 가득한 시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한 인간의 존재를 네 가지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땅 위에 있음” “하늘 아래 있음” “신성함을 마주함” “죽음의 운명 속에서 살아감” 이 특징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땅위에 있는 모든 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것 같지만 나는 결국 하늘 아래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삽니다. 가끔 잊어먹고 살 때도 있지만, 때때로 하나님과 마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저러나 우리는 모두 죽음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혼자만 두려운 것 아닙니다. 무엇이 절실합니까? 혼자만 절실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를 위한 골든타임입니다.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이 복된 절기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