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3일 강림절 제4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
이관택
누가복음 2:8-16
8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13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15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16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떤 이는 너무 억울하고 절망하여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텔레비전 전원을 켜기가 무서워졌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제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포기합니다.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이민 가야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신문을 보니 이번 선거 후의 결과를 두고 패배한 48%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 후에 남는 스트레스성 장애를 말합니다. 그만큼 절실하게 새로운 세상을 희망했는데,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그 희망이 산산조각 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절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이렇게 실의에만 빠져서 되겠습니까?
20대 청년인 딸이 이번 선거가 끝나고 아버지에게 낙심하여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나의 20대는 이명박으로 시작해서 박근혜로 끝나네요.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20대 내내 박정희였고, 30대 내내 전두환이었어.”
지나고 보니 우리 한국의 역사라는 것이 참 가시밭길 투성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위대한 신학자였으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함석헌 선생님께서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너무나 연약하여, 주변의 나라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우리의 수난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역사를 써내려 간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그 역사의 의미들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여, 또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수난의 세월을 보내왔지만, 그럼에도 꺽이지 않는 민족의 기상과 민중들의 주체적인 힘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나라이지만, 땅덩어리가 비록 강대국의 식민지로 편입되고, 허리가 두동강이 나서 분단의 아픔을 겪고, 군사독재가 창궐한 절망의 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밑에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민중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구약성서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나라의 흥망성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얼마나 잘살게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는가?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은 강림절 4번째 주일입니다. 이 기다림의 절기,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궁극적으로 이 현상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길 소원합니다. 절망 뒤에 숨어있는 희망을 캐내고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절망 뒤에 숨어있는 희망을 캐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캐내십시오, 희망을 캐내십시오. 오늘 말씀은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기예수의 나심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이 목자들은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메시아로 오신다는 아기예수를 찾아 나섭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어떤 존재인지 천사가 한 말을 그 부부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성서를 보면 아기예수가 구원자임을 선포하고, 예고하는 장면이 여러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기예수’가 평범한 아기가 아니라 모두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의 메시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절망하지 마세요. 곧 구원자가 오십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 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아이는 절대로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아이를 통해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라는 예고입니다. 아기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 부모도 있습니까? 그 부부에게 특별하지 않은 아기도 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에게 잇어서 우여곡절 끝에 얻은 이 아이가 얼마나 소중할까요? 마굿간에서 낳을 수 밖에 없어서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을 텐데, 이 두 부부에게 오늘 목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아기가 평범한 아기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를 가져오게 할 고귀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의 상태를 두글자로 나타내면 바로 불안입니다. 도대체 언제 어느 곳에서 양을 해할지 모르는 짐승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칠흑같은 밤입니다. 도둑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이 목자들의 모습에서 ‘불안’에 휩싸인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당시의 목자는 양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저 남의 양을 맡아줄 뿐입니다.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양떼를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지켜야하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자신의 삶이 주체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만 아무일 없이 지나 가기만을 바라는 불안하고 의미없는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이들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목자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런데 그 때에 천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첫마디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목자들의 마음에 두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불안하고 절망했던 지금 그 상태를 여기서 멈추라는 것입니다. 잠깐 멈춰! 두 번째는 모두를 위한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 동안 내 한목숨 챙기기기도 버거웠던 목자들이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한 엄청나게 중요한 사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람을 들어서 큰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 큰 사람을 만드는 방법은 바로 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치 못햇던 것이 나의 근심이 되고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대선개표 방송을 몇몇 성도님들과 함께 보면서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나라의 일을 이렇게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마음아파하시는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대선의 결과가 자칫 지금 철탑에 올라가 계신 분들게 해가되지 않을까. 또 지금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를 위한 큰기쁨 그야말로 진정한 복음을 기다리는 소중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목자들과 천사의 만남을 통해 목자들은 새롭게 변합니다. 저는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만나고,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두려움을 멈추고, 나의 관심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목자들은 급하게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구원자가 나셨다는 희망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아기가 구원자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12절을 보면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이 표징이라고 하였는데, 참 애매하고 광범위한 말입니다. 갓난아기라는 표현이 생후 몇 개월까지 일까요? ‘구유’라는 표현이 그나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지는 않은 표현이지만, 그것 또한 정확하진 않기 때문에 이 목자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소설을 한번 써보려 합니다. 목자들은 아마도 천사를 만난 후에 벅찬 감동과 이 소식을 어서 빨리 전해야겠다는 긴박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들레헴에 오늘 16절 말씀처럼 급하게 달려가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기가 구원자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만나는 모든 부모에게 간곡히 말합니다. 이 아기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마굿간 말구유에 놓인 아기 부모에게도 말합니다. 이 아기가 하늘의 영광 땅의 평화를 가져올 소중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희망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습니까? 하지만 저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본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가운데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잇습니다. 이 무식한 목자들처럼~ 그누구를 만나도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 어떤 아기를 만나도 평범하지 않다고, 누가 천사가 지칭한 아기예수인지는 모르겟고, 일단 급하기는 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천사의 말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그 중에 분명히 아기예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실은 모든 아기들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킬 희망일 것입니다.
왜 아기가 희망일까? 아기는 계속 태어납니다. 너무 익숙해서 새로울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주 친한 전도사님의 아이 백일잔치에 참여하고, 또 어제 친한 친구의 아버지 장례에 다녀오면서 아기가 희망이라는 생각을 절실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 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새생명’의 탄생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영화를 보면 출산률 0%의 세상이 등장합니다. 그 누구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세상 그야말로 절망밖에 없는 세상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아기 부처 들어보셨나요? 아기 마호멧 들어보셨어요? 종교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마호멧도 아기로 태어났겠지요. 저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자연스러운 혁명에 우리는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요? 일상 속에 만나는 아기예수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일상 곳에 숨어 있는 희망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희망들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구주를 기다리는 것이 강림절이기도 하지만 구주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오늘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놓인 아기예수를 찾아내고 발견했듯이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 성탄절은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듯, 이 암혹한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합니다. 성탄절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연합예배가 있습니다 성탄절 전야에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새벽송 행사도 있습니다. 구유에 있는 아기들까지, 아니 오히려 구유에 있는 아기가 진정한 표징이라고 했던 천사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감격이 넘치고, 기다려지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