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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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 사이에서 경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롯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우선적인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 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나온다. 평천하, 즉 천하를 평정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출발점은 수신이다. 자기 몸을 닦는다는 것이다. 자기로부터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향한 경건한 삶도 자기로부터의 경건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대해 정신과 의사가 진단을 내린 것을 본 적이 있다. 'A라는 여성이 있다. 어느 날 첫눈에 '내 사람'을 만났다.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녀의 관심과 모든 행동은 한 이성이라는 채널에 맞춰진다. 그의 말 한마디, 작은 표현에도 감격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가 없으면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아 늘 좌불안석이다.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녀의 집요함과 왜곡된 환상은 결국 남성을 떠나보낸다. 이후 그녀의 행복과 자존감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경우를 사랑중독이라고 부르나 본데 원인을 어린 시절에서 찾는다. 사랑중독자들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반복적으로 좌절됨으로써 자신이 무가치하며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사랑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잠재돼 있다. 애정을 주는 사람이 자신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타불이”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왜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창 1,26).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물론 이 경우는 자아도취와 이기심, 과도한 자기애와는 다르다)은 인간을 향한 경건함을 이루는 출발점이다. 이 경우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제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이 ‘MADE IN HELL'이 아니라 ’MADE IN HEAVEN'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 종노릇 하지 않도록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진리가 충만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정적인 자의식,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 잘못된 습관과 가치관, 허위의식, 정신분열 등과 같이 자기를 병들게 하는 모든 요인들과 결별하고 진리와 동행하는 삶이 바로 자신에게 경건한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경건히 섬기는 사람은 ‘주께 하듯 하라’(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엡 5,22. 종이 주인에게 주께 하듯 하라. 엡 6,7)는 말을 기억한다. 사람에 대한 경건, 이웃에 대한 경건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관계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형상 따라 지음 받았음을 안다면 그 말씀이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심지어는 불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해당하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길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로 묶여 있다(마 22,37-40).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에게도 경건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휴머니즘, 인본주의는 경건한 삶의 한 단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끔 어떤 설교가들은 휴머니즘을 맹비난한다. 그러나 참된 휴머니즘은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적인 가치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머니즘, 인본주의는 인간에 대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인 가치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거나 매너 있게, 정중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경건은 외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매너 혹은 대인관계에 집착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좋은 인상을 주는 것, 좋은 인상을 받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다보니 진실한 인간적인 관계 보다는 거래의 관계나 외피적인 관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간 사이에서 사람에게 경건하다고 할 수 없다.

 

우선 참다운 인간관계의 경건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기본위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향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 사이에서의 경건함을 결실하게 한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은 항상 관계의 단절을 야기한다. 상대방도 하나의 존엄한 인격체로써 자기의 처지와 정황이 용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자기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자세가 많다.

며칠 전에 한 여자 목회자를 만났다. 요 며칠 사이에 어떤 친구와의 관계가 조금 어색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예배당 이전으로 돈이 필요했던 친구 부부가 있는데 그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자기 교회에서 전세이전을 위해 모아두고 있는 돈을 빌려주려는 마음을 먹고 또다른 친구를 통해서 그 말을 전했다. 그런데 그 돈이 필요한 친구가 전화를 했는데 다짜고짜 ‘돈 500만원만 빌려줄 수 있냐’고 묻더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버무리다가 그냥 못꾸어 준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단다. 그래서 왜 화가 났는데도 그 친구에게 화났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왜 그 친구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주의를 주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화나지 않았으며 자기가 충고를 하면 친구의 자존심이 너무 상했을 것 같아 그 친구를 배려하느라고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 여목회자는 분명히 화가 났었고 그럼에도 화를 내거나 친구에게 충고하지 않은 것은 그 이후에 생길 지도 모르는 불편한 관계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주기 두려워하는 태도가 결국은 마음을 닫아걸게 만든 것이다. 진정한 친구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열리지 않은 마음으로 맺는 관계는 안으로 곪게 된다.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시킨다.

이런 경우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경건함이란 성립될 수 없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이웃의 고통을 알게 될 것이고 조금 더 열면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된다. 왜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였으며 왜 그렇게 말하였을까, 그를 그렇게 만든 상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야만 인간 사이에서의 경건이 성취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보면 병원에서 임상목회훈련을 받고 있는 한 신학생과 다리수술을 받기 위해 지방에서 온 소박한 농장노동자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오늘날의 세대를 진단하고 있다. 여기서 헨리 나우웬은 마음을 열어 인격적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신학생의 미숙함을 지적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최선을 다 했지만 가장 중요한 내면적인 교류, 인격적인 이해와 인정의 과정이 부족하였기에 두려움을 느끼며 존재감을 위협받고 있는 이 농장 노동자를 제대로 돕지 못했다. 결국 그는 수술 중에 죽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노동자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을 이 신학생이 좀 더 내면적인 관계를 위해 마음을 열었더라면 더 나은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 간의 경건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의 현재 모습이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 5,37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옳다, 예, 좋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어찌 악한 모습을 보면서도 옳다, 좋다, 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를 진실하게 대하지 않고 있는 증거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필연적으로 좋은 것이 악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 인자한 표정만 지으실 것 같은 예수님도 때론 불같이 화를 내시고 질타하시기도 했다. 바리새인들의 거짓과 위선을 보시고는 ‘독사의 자식들(아마도 뱀같이 야비하고 흉측한 놈들이라는 뜻일 게다), 회칠한 무덤(겉과 속이 다르고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썩을 대로 썩은 놈들이라는 뜻일 게다), 개들(요즘 말로 하면 개새끼)’이라고 독설을 퍼부으셨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시며 폭력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질책과 비판의 행동들이 무조건 바리새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도 마음을 돌이킨 이들은 주님께 칭찬을 듣고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이 있으셨다. 사람사이에서 경건한 것은 때로 무서운 질타로 나타나기도 하고 모진 비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 안에는 근본적인 신뢰와 사랑, 애정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자녀를 기르는 부모에게 매를 아끼지 말라는 잠언을 주고 있기도 하다(잠언 23,13-14). 그러다보니 일시적으로는 인간관계가 불편해지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과 진심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말고 인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사이에서의 경건한 삶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에게 경건하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웃, 타인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좀더 확대되어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이해, 경건한 태도도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라는 집단적 구성체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종교적인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인적인 영성과 경건이 있으면 신앙이 좋다고들 여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건한 개인적 신앙인들이 많다지만(국민의 20% 정도나 된다) 이 사회가 경건해지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회에서 물의를 빚는 경우는 많다. 이 경우에는 그 경건함이 거짓이었거나 개인적 경건이 사회적 경건으로까지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의 그릇된 선택과 행보는 사회에 많은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반대로 한 두 개인의 절대적인 희생과 헌신이 전체 사회를 개혁시키거나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사회는 나름대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생명성이 경건해지면 개인적인 삶도 전체적으로 경건해진다. 하나님은 개개인과 관계를 맺으시기도 하지만 사회라는 구체적인 장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사회를 향해 경건한 자세를 갖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경건함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사회를 향한 경건한 삶의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삶을 근본적인 토대로 한다. 사람 사이에서의 경건은 가장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 자기 이해와 사랑(자존감 회복), 자기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타인 이해, 그리고 인간이 모여 이룬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내용들을 후에 심도 있게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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